김기훈기자

서울 여의도의 증권사에 근무하는 미국인 K씨는 최근 코오롱캐피탈 임원의 472억원 횡령 이야기를 듣고 두 가지 점에서 크게 놀랐다고 한다. 자금담당 임원이 회사 재산의 절반(53%)을 가로채는 도덕적 불감증에 놀랐고, 사건이 진행되던 지난 5년간 관련자들이 아무도 감지하지 못한 통제 시스템에 할 말을 잊었다고 한다. 그는 “아시아 금융 허브를 지향하는 한국의 금융수준이 이 정도냐”며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K씨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코오롱캐피탈의 자금담당 임원 정모씨는 1999년부터 올해 8월까지 1000여 차례에 걸쳐 회삿돈 472억원을 빼돌려 개인적인 주식투자를 하다가 대부분 날렸다.

하지만 정씨의 범행을 일차적으로 감독해야 할 회사 경영진과 감사는 지난 5년 내내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매년 정기감사를 벌였지만 거래 금융기관의 ‘잔액증명서’를 잘 위조해 놓은 정씨의 수법에 모두 속아 넘어갔다고 한다.

업계 굴지의 S회계법인은 1991년부터 매년 회계감사를 벌여왔지만 텅빈 계좌를 발견하지 못했고, 감사보고서의 결론은 항상 ‘이상무(無)’였다. 심지어 지난 8월 하나은행이 코오롱캐피탈을 위탁경영하기 직전에 맡긴 현장실사(現場實査)의 결과도 ‘이상무’였다. 위조서류만 믿고 OK사인을 한 것이다.

대대적인 검사를 벌인 금융감독원은 아예 ‘눈 뜬 장님’이었다. 금감원은 2001년 코오롱캐피탈에 대한 정기검사 후 ‘정상’ 판정을 내렸다. 거래 금융기관에 확인 전화 한 통만 했어도 드러났을 ‘원초적 단순범죄’의 단서조차 못 잡았다.

5년간 이어지던 범죄는 위탁경영을 맡은 하나은행 간부가 정씨에게 “통장을 가져와보라”고 요구하면서 마침표를 찍었다. 사상 최대의 금융기관 횡령사고가 진행되던 동안 해당 금융기관과 회계법인, 금융감독기관의 금융통제 시스템은 완전 불통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