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부터 운동권 의식화 교재 목록의 첫자리를 차지했던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지금도 꾸준히 읽히는, 말 그대로 현대의 고전이다. 1997년 까치출판사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해 출간한 것을 기준으로 해도 지금까지 17쇄를 찍었다. 대략 1년에 3쇄 정도이니 전형적인 스테디셀러인 셈이다.

제1장의 마지막 문장을 장식했던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그럴싸한 정의와 더불어 20년 넘게 우리 주변에 머물러 있는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의 힘은 무엇보다 사고의 경직성을 가차없이 부숴버리는 데 있다. “지난 50년 동안에 세계를 뒤흔든 사건들을 겪었지만 자신의 세계관에는 그다지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다고 솔직하게 주장할 수 있는 역사가가 있다면, 과연 그를 부러워해야 할 것인지 나로서는 자신이 없다.” 오히려 우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패러디해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에 써넣은 구절, “그래도 이 세상은 움직인다”를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카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에 이르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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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역사의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가 말했던 현재와 과거의 대화로서의 역사라는 개념은 당시 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던 실증주의 학풍을 비판하기 위해 딜타이 크로체 콜링우드 등의 기본사상을 소개하기 위한 장치였을 뿐이다.

“세상은 움직인다.” 늘 기성권력은 세상의 불변성을 내세워 자신을 방어하기 때문에 이 말은 위협이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운동권에 발을 디딘 학생들이 이 책에 열광했던 것은 카 자신의 이념적 성향인 중도좌파 성향에 공감해서라기보다는 “세상을 움직이고 싶은” 열망에서 비롯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역시 세상은 움직였고 이제 카의 책을 탐독했던 소위 ‘운동권 386’들이 한국사회의 요소요소를 차지했다. 기성권력이 된 셈이다. 그런데도 카의 책은 꾸준히 읽힌다. 그것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담긴 내용이 ‘운동권 386’의 사상을 대변해서라기보다는 어느새 ‘운동권 386’도 변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신세대의 동물적인 독서감각 때문인지 모른다.

게다가 사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던진다는 것은 얼마나 한가한 놀음인가? 아니 한가하게 들려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내외적으로 역사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친일청산이 어떻고 과거사 정리가 어떻고 동북공정이 어떻고 일본제국주의의 잔재가 어떻고….

우리 사회는 지금 역사가 현실이 되고 현재는 어딘가로 내팽개쳐진 상태다. 각종 과거사들이 현재의 현실을 점령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면 과거와 과거의 대화만 남고 현재는 없어진다. 카는 분명히 말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그러면 과거와 과거의 대화는 역사도 아니고 뭐라 불러야 하나? 그런데도 옛날에 카를 잘못 읽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는 과거사 정리야말로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무식한 소리를 해댄다. 적어도 그런데 써먹으라고 E. H. 카가 그 멋진 말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카의 말을 되새긴다. “세상은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