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권 지도부의 신경이 매우 예민해진 듯하다. 이해찬(李海瓚) 국무총리, 이부영(李富榮) 열린우리당 의장, 천정배(千正培) 원내대표 등 삼두마차의 각종 현안에 대한 입장 표명이 거의 ‘신경질적’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날카롭다. 무엇보다 비판·반대 진영을 겨냥한 독설에 가까운 발언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 총리는 21일 국무회의에서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를 보면 폐지 반대 쪽에서 현 정부에 대해 ‘친북 반미 좌익 정권’이라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며 “정부가 분명한 입장을 갖고 엄정 대처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발언에 대해 정순균(鄭順均) 국정홍보처장은 “근거 없는 음해는 안 된다는 원칙적 입장을 표명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총리가 직접 나서서 현 정권에 비판적인 야당과 보수 단체·언론 등에 대해 ‘위협적 경고’를 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사실 상대편이 가장 싫어하는 호칭을 붙여 낙인찍는 것은 오히려 현 여권이 상용해 온 방식이다. 여권은 자신들의 국정 운영을 비판하는 측에 대해 ‘반(反)개혁’ ‘수구(守舊) 세력’ ‘독재 기생 집단’ 등으로 부르곤 했다. 심지어 국가원로들이 잇따라 국보법 폐지 움직임에 우려를 표시하자, 여권 인사들은 온갖 독설을 늘어놓았다. 이 총리는 지난 15일 국회 답변에서 원로들의 시국선언에 대해 “쿠데타 주도 세력이 (시국선언 명단에) 여러 분 들어가 있는데, 그분들이 이제 와서 자유민주수호를 위해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선 안 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천정배 원내대표도 “늘 그런 분들”이라며 경멸에 가까운 반응을 보였다.
이부영 의장은 지난 8일 “과거사 진상규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유전자가 어떤지 감식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이 의장은 또 21일 당 기획자문회의에서 “한나라당 내에 정말 한 줌도 안 되는 공안기관 출신들이 그들만의 국보법 유지에 발버둥치고 있다”고도 했다.
여권 지도부의 ‘짜증 지수’가 높아진 것은 정국이 당초 계획표대로 풀리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여권이 올해 정기국회에서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국가보안법 폐지와 친일·과거사 진상 규명법 통과 등 이른바 ‘개혁 과제’의 완수다. 그러나 여권의 ‘개혁 전선’은 생각했던 것처럼 순항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반대 의견이 압도적인 여론의 벽이 높다. 여권 내부에서까지 심상치 않은 반발이 나오고, 여권에 비판적인 세력들이 결집하는 듯한 양상이다.
결국 열린우리당 지도부는 추석 연휴 직전인 23일까지 국보법 폐지와 친일진상법 개정안, 과거사진상 규명법, 언론개혁 등 주요 현안들의 골격을 완성하거나 국회 절차를 마무리짓겠다던 장담과는 달리 이 문제들을 10월 국정감사 이후로 미룰 수밖에 없게 됐다.
여당 내부의 혼선도 거듭되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21일 국보법 폐지를 위해 당내에 설치했던 태스크포스(TF)를 해체했다. 이 팀은 지난 5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방송 인터뷰에서 국보법 폐지를 강도 높게 주문하자 지난 10일 부랴부랴 만들어졌는데, 불과 활동 시작 열흘 만에 문을 내린 것이다. 그 배경에는 당론 결정의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할 이 팀 내에서조차 국보법 폐지 후 대안으로 ‘형법 보완’을 주장하는 측과 ‘대체입법’을 요구하는 측이 워낙 팽팽히 맞서는 것에 천정배 대표 등 당 지도부가 강한 불만을 갖게 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당의 국보법 폐지 후 대안에 대한 법무부의 부정적 의견 개진 보고서(본보 21일자 1면)가 언론에 보도되는 등 혼란이 계속된 것도 팀 해체 이유 중 하나인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