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권좌에서 물러난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은 후임자인 후진타오 총서기를 비롯한 중국 공산당 제16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16기 4중전회) 참석자 전원과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 장 전 주석과 후 총서기는 이날 인민대회당에 함께 모습을 드러낸 뒤 뜨겁게 악수했으며 참석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후 주석은 참석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후 “존경하고 친애하는 장쩌민 동지가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왔다. 모두 뜨거운 박수로 장 동지의 연설을 환영합시다”라고 말했다. 장 전 주석은 “나는 모든 동지들이 열심히 매진하고 총서기 후진타오 동지를 중심으로 당 중앙위원회의 지도 하에 계속 전진하기를 바란다”고 화답했다.
장쩌민의 별명은 ‘하오하오 선생(好好先生)’이다. 무슨 일이든, 누구에게든 ‘좋아(好), 좋아’ 하며 웃는 낯으로 대한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이 별명은 그를 중국 권력층의 최고 자리로 밀어올린 중요한 요소이다.
1989년 중국이 천안문(天安門)사태로 대혼란에 빠졌을 때,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덩샤오핑(鄧小平)은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자오쯔양(趙紫陽) 당 총서기를 실각시키고, 권력 서열에서 한참 밀리는 장쩌민 당시 상하이(上海) 당서기를 전격 발탁했다. 발탁 배경은 ‘그가 어떤 정파에도 속하지 않고, 청렴하며, 원로들의 의견을 잘 따른다’는 것이었다.
장의 재임기간은 1989년 당 총서기 취임부터 올 9월 군사위 주석직 사임까지 15년. 이 기간 장쩌민은 덩샤오핑이 마련한 ‘개혁·개방 노선’을 훌륭히 관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임기간 중국은 불안한 개도국에서 세계 정치·경제의 대국으로 변모했다. 중국 인민들은 이 기간 ‘원바오(溫飽·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옷 입는 생활)’ 수준을 넘어 ‘샤오캉(小康·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뒤 생활에 좀 여유가 있음)’ 수준에 도달했다. 15년 사이에 중국이 이렇게 변모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동안 장쩌민에 대해 일부에서 ‘무능하고 특징 없는 인물’로 저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천안문 사태의 혼란과 그 이후 경제적 위기를 무난히 극복한 것은 장의 리더십 덕분이었다.
장의 리더십은 외유내강(外柔內剛)형이나 권력투쟁에서는 강인한 면모를 보였다. 그가 시골(상하이)에서 서울(베이징)로 처음 올라왔을 때 중앙의 견제는 만만치 않았으나 이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그는 퇴임 이후에 대해서도 철저히 준비, 2002년 11월 제16차 당대회 때 7명의 공산당 중앙상무위원을 9명으로 확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파벌을 4명이나 진입시켰다.
장은 재임기간 미국을 비롯해 서방과의 외교관계를 크게 개선한 지도자이기도 하다.
유고 주재 중국 대사관에 대한 미국의 오폭과 하이난다오(海南島) 군용기 충돌사건 등으로 대미관계에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장은 무난히 극복하고, 경제 발전에 필요한 평화적인 대외환경을 조성했다.
장의 장점은 세련된 국제감각과 뛰어난 유머감각, 그리고 음악적 조예이다. 그가 조어대(釣魚臺)에서 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날 저녁이면 시끌벅적한 연회가 벌어져 농담이 오가고, 그 자리에서 장은 미국 노래 ‘러브 미 텐더’나 이탈리아 가곡 ‘오 솔레미오’ 등을 멋드러지게 불렀다. 이를 통해 그는 외국 원수들과의 격의를 없애고 ‘친구’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