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이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이 되는 해여서 여기저기서 1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그렇지만 이벤트성 행사만 눈에 띌 뿐 우리나라가 50만 고려인을 진정한 동포로 껴안으려는 근본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 고려인의 경제 형편이 비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즈베키스탄에서 더 이상 살기 어려워 러시아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지만, 이들의 법률문제를 돕는 최소한의 일조차 되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법률적·경제적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한민족으로서의 주체성조차 분명히 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을 그들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들이 우리말과 문화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1938년 가을, 스탈린은 일본과 전쟁을 치르기에 앞서 연해주 일대의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기로 하고, 어느 날 새벽에 고려인 지도자 3000명을 불러내 총살시키고 남은 사람 모두를 사흘 내로 시베리아 열차를 타게 해서 중앙아시아로 15만명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1만5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동포들은 황량한 벌판에 땅굴을 파고 겨울을 견뎠고, 다시 살아남았다.
그 후 동포들은 그 지역 원주민보다는 잘살게 되었지만 민족의 지도자들을 다 잃어버리는 바람에 유감스럽게도 우리말과 문화를 유지하지 못했다.
중국의 조선족은 우리말을 하며 한국을 자주 내왕하지만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비극적인 역사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나간 고난의 역사가 고려인에게 안겨준 짐을 그들이 잘 견뎌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회복하고 민족적 주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해야 한다.
2년 전 정부는 조선족과 고려인이 입국해서 돈을 벌 수 있도록 취업관리제라는 제도를 만들어 친척 방문으로 입국하면 3년간 일할 수 있게 해놓았다. 그리고 친척이 없더라도 법무부장관이 특별히 인정하는 동포의 경우 특별대상자로 입국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일부 사할린 동포를 제외한 98%의 고려인은 친척이 없어 한국에 오지 못한다. 재외동포법도 이들에겐 무용지물이다. 재외동포법이 고려인을 대상으로 포함시키기는 했으나 호적등본(혹은 제적등본)을 제출해야 법 적용을 받는데 고려인의 98%는 호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러시아 한인이주 140주년을 기념해서 한국 정부가 고려인에게 반드시 주어야 할 선물이 있다. 그것은 1년에 최소한 고려인 5000명이라도 취업관리제로 한국에 와서 3년간 돈을 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선발은 한국어 성적순으로 하는 것이다. 많은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서 돈 벌기를 원하고 있다. 고려인 사회에 한국어 붐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10년쯤 지나면 고려인 사회가 대부분 우리말을 회복할 것이다. 50만 고려인이 우리말과 문화와 민족의식을 되찾을 수 있다면 이것은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엄청난 민족의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 돈이 특별히 들 것도, 법령을 제정할 필요도 없다. 그냥 법무부장관이 정하기만 하면 된다. 한국어시험은 미국의 토플처럼 민간기업이 주관하도록 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기업은 이미 한국에 존재한다.
이번 노무현 대통령의 카자흐스탄·러시아 방문을 계기로 한국이 고려인에게 ‘한국어 시험 성적순으로 매년 5000명 입국’이라는 선물을 주기 바란다.
(서경석·서울조선족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