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공사관[아관·俄館]에 파천하여 1년을 지낸 대군주 폐하 부자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지 8개월. 대한문 건너편 남별궁(南別宮) 터(현재 서울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 자리)에 거대한 원구단(?丘壇)이 섰다.
“오! 천단(天壇)이라서 둥글구먼. 크기도 하네!” 보는 사람마다 입이 벌어졌다. 잘 다듬은 돌을 쌓아올린 3층의 원형 제단은 각층의 높이가 석 자, 지름은 1층 140m, 2층 72m, 3층 36m의 거대한 건축물인 데다가 아름다운 부속 건물인 황궁우(皇穹宇)와 긴 담장과 사면의 홍살문들까지 갖추느라 1000여명의 숙련된 인원들이 거의 한 달 동안 쉴새없이 일해서 완성시켰다. 임금이 황위에 오름을 하늘에 고할 원형 제단이었다. 중국에서 천자가 동짓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형의 언덕을 ‘원구(?丘)’라고 부르는 데서 따서 원구단이라 지었다.
1897년 10월 12일 오전 2시, 대군주(고종) 부자는 경운궁을 나와 원구단으로 갔다. 최상의 예복으로 성장한 관리들과 군사들로 이루어진 긴 행렬을 거느린 장엄한 행차였다. 대군주는 원구단에 올라가서 자신이 제위(帝位)에 오름을 하늘에 고함으로써 황제가 되었다. ‘국왕 전하’가 2년 전 홍범 14조 반포로써 ‘대군주 폐하’가 되었고 이제 ‘황제 폐하’가 되었으니, 위호만으로 보자면 생애 최고의 정점에 오른 것이다. 연호로 ‘광무(光武)’를 썼기에 역사에서는‘광무황제’라고도 불린다.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조선의 군신이 새삼 느낀 것은 문자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 세월의 격렬한 요동이었다. 불과 3년 전, 청일전쟁 이전만 해도 조선의 군주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무사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이젠 이토록 성대하게 황제 즉위식을 거행해도 아무런 탈이 없을 뿐 아니라 즉위 다음 날인 13일에는 각국 공사들이 일제히 알현하여 황제 즉위를 축하했다. 국호도 이날부터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이런 시대가 도래했는가. 따지고 보면 교통의 발달이 시대를 여기까지 끌어왔다. “하늘에 해가 하나이듯, 천하에는 천자(황제)가 하나다”라는 동양의 전통적인 철칙은 바람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범선의 시대인 쇄국주의적 세월에나 통용되는 낡은 관념이었다. 증기 기관을 써서 바람과 상관없이 대양을 마구 누비는 기선의 시대가 되어 세계 각국이 쉽게 서로 오가는 시대가 되어 바라보니 세계 도처에 황제였다.
이런 시대라면 황제가 아닌 통치자는 다른 나라의 황제들과 나란히 설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새로운 시대의 실체를 광무황제 못지않게 일반 국민들도 확실히 알아보았다. 그러한 정서와 반응을 잘 드러낸 것이 당시 조선 유일의 신문이었던 서재필의 ‘독립신문’ 기사이다. 이틀 뒤인 10월 14일치 신문에 실리기 시작한 즉위식 보도 기사는 “광무 원년 10월 12일은 조선 사기(역사)에 몇 만년을 지내더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 될지라”라는 신선한 감격으로 가득 찬 문장으로 시작된다.
서재필은 막중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황제 즉위식을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이달 12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 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나라가 이렇게 영광이 된 것에 어찌 조선 인민이 되어 하나님을 대하여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라면서 “우리 신문에 대개 긴요한 조목을 기재하여 몇 만년 후라도 후생들이 이 경축하고 영광스러운 사적을 읽게 하노라”며 당시의 행사를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행렬 참가자들이 차려입은 의장이며, 즉위식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행사여서 야밤인 오전 2시에 거행되었음이 독립신문에 생생하게 담겨있다. 도성 안의 궁궐과 관청의 전각은 물론 백성들의 집까지 모두 석등을 밝게 내달아 밤이 낮같이 밝았던 일과, 행사 중 비가 와서 참가자들의 의복이 젖고 찬 기운이 성하였으나 국가의 경사로움을 생각하여 맡은 직무를 착실히 수행했다는 것이 독립신문의 기쁨에 찬 증언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영화는 토대가 너무도 빈약했다. 고종은 황제에 오른 다음달, 2년간 미뤄왔던 명성황후(추존)의 국장을 성대하게 치르는 것으로 지난 세월의 아픔을 씻어버리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였으나, 실제 세상은 그렇지 못했다. 조선이 독립국으로 ‘대한제국’을 세운 것은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 안에서 이루고 있는 팽팽한 세력 균형에 의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는데, 거기에 이미 균열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멀리 요동반도의 주요 요새인 여순과 대련이 원인이었다. 요동반도는 본래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차지했던 것을 삼국간섭으로 토해내게 했다. 그런데 1898년 3월에 러시아가 느닷없이 청으로부터 여순과 대련을 조차하여 점거했다.
“우선 여순과 대련을 우리 것으로 확실하게 굳혀놓는 게 중요하다.”
러시아 통치권에서는 가능한 한 큰 말썽이나 후유증 없이 신속하게 그 작업을 완료하기 위한 방도를 찾았다. 그 해답으로 나온 것이 대한제국 문제에서 일본에 양보하는 것으로서, 요동반도를 빼앗긴 일본의 불만을 줄인다는 것이었다. 러일전쟁의 포연은 아직 감지되지 않았으나, 조선을 미끼로 한 두 강대국의 세력 다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지 불과 6개월 만인 1898년 4월 25일에 일본의 도쿄에서 일본 외상 니시(西德二郞) 주일 러시아 공사 로젠이 조인한 3차 협정은 과거의 러일 협정과 달랐다. 여순과 대련을 움켜쥔 러시아의 양보로 일본은 한반도에서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상당량 인정받게 되어 다시 세력을 떨칠 토대를 확보했다.
과거 일본이 을미사변의 참극까지 감행하여 조선을 완전히 손아귀에 장악했을 때, 고종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아관파천이란 카드로써 그 상태를 분쇄했다. 그러나 이제 러시아와 일본이 전략적 제휴 관계에 들어가자 더 이상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전략은 통하지 않게 되고, 황제인 그는 대군주일 때보다 더 무력했다.
※다음 회는 ‘만민공동회’입니다.
(소설가 송우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