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감우성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1)의 감우성은 오래된 서랍 안에서 고이 간직된 빳빳한 지폐 한장을 새로 찾아낸 듯한 기쁨이었다. 여자와 잠은 자되, 결혼은 사양하는 시니컬한 대학 강사 역은 그간 그가 TV에서 보여준 지적 이미지 자체를 재료로 삼아 변신했다는 점에서 더욱 탄탄한 신뢰감을 주었다.

그 감우성이 꼭꼭 숨어 있다 3년 만에 영화 두 편을 들고 관객 앞에 나타났다. ‘알 포인트’가 20일 개봉하고, 2주 후인 9월 3일 또다시 ‘거미숲’이 개봉한다.

왜 그렇게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일까. 사실은 그가 활동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2001년 말쯤 출연을 결심한 ‘알 포인트’의 감독이 바뀌고, 제작이 취소됐다 다시 재개하는 우여곡절을 겪었기 때문이다.

“현장적응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철수하라는 소식이 왔습니다. 나름대로 갈등도 했고, 그러다가 재촬영에 들어갔습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보다 일찍 개봉될 영화였는데….”

맘 고생이 느껴진다. 배우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다.

“아직까지는 일의 순수성을 가장 염두에 두고 싶습니다. 사람들과의 신뢰, 무엇보다 놓치기 아까운 참신한 소재여서 끝까지 하기로 했습니다.”

“‘알 포인트’에서 최 중위는 성병에 걸린 낙오자들을 모아 죽은 이들로부터 무전이 오는 ‘로미오 포인트’를 찾아 나섭니다. ‘나가면 피를 본다’는 징크스를 갖고 있는, 그래서 전쟁이라면 환멸을 느끼는 캐릭터인데, 그걸 연기하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촬영 현장인 캄보디아에 가보면 그걸 상상하기에 충분한 느낌이 옵니다.”

그가 여러 고비를 넘겨가며 ‘알 포인트’ 출연을 사수(死守)한 것은 영화가 제안하는 공포의 질감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중에 귀신이 나오는 장면은 사실 좀 불만스러웠어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들 사이의 분열상만으로도 충분히 공포를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군복이 잘 어울린다’는 말에 감우성의 대답은 역시 그답다. “군복은 누가 입어도 어울립니다. 어울리는 사람이 입는 게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는 ‘알 포인트’를 태풍이 몰아치는 오프로드를 헤치고 힘겹게 도착한, 그러나 몇 등으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는 영화라고 정의했다. 야박할 만치 냉정한 평가에는 자신에 대한 경계심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알 포인트’가 감우성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의 도전이었다면, 9월 열리는 산 세바스찬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거미숲’은 심화(深化)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고, 불륜의 연인과 그의 또 다른 정부를 살해했으며, 그 심연에 또 다른 유년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시니컬한 성격의 PD 강민은 의식과 무의식 사이의 골짜기에 숨어 있는 죄의식의 상징적 인물이다.

“촬영 전 송일곤 감독이 ‘죄와 벌’을 읽어 보라 했어요. 라스콜리니코프가 노파를 살해한 후 다락방에서 괴로움, 칙칙함, 찝찝함과 같은 더러운 기분에 휩싸여 있는 분위기가 주인공의 심리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거미숲’의 감우성은 그가 머지않아 작가주의 영화 감독 중 누군가의 ‘페르소나’가 될지도 모른다는 짐작, 혹은 희망을 갖게 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가 섬세하고 유약하고 젠틀한 이미지를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의 그는 꽤 고집이 세고 따지는 편이다. 물론 젠틀하게. 이런 배우들일수록 흥행보다는 ‘작품’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그래서 감독들과도 쉽게 ‘형, 동생’ 분위기를 만들지 않는 법이다.

그런 만큼 스타로서의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의 연기 보폭이 좁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러하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한 주제를 놓고 싸울 때 그게 옳고 그름에 의해 판단됩니까. 그저 힘의 경쟁, 그 성패에 따라 결과가 나올 뿐이지요. 세상이 이런데, 평가요? 절반은 포기하겠습니다.” 배우 감우성의 앞길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