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15일 미국에 치욕적인 무조건 항복 이후 59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이미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일 뿐 아니라 군사대국으로도 부상하고 있다. ‘과거의 숙적’ 미국의 최우방국으로 변신해 숙원인 군사력을 증강하고 국제 정치적 입지를 대폭 강화해 나가고 있다.
일본 자위대가 파견된 이라크 남부 ‘사마와’ 기지의 아침 7시. “안녕하십니까. 사마와 방송입니다. 오늘의 신청곡은…” 스피커를 통해 퍼져나가는 음악방송은 영화 ‘굿모닝 베트남’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곳 자위대 기지에는 50석의 텐트극장이 있고, ‘라스트 사무라이’ ‘블랙호크 다운’ 등 영화가 상영된다. 숙소 침대 위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흘러나온다.
이곳의 자위대원은 560명이지만, 기지의 음용수 정화시설 9개의 하루 처리 용량은 4만명분에 해당하는 160t. 현지 주민의 호의를 얻기 위한 양이다. 일본 주간지 아에라는 자위대원들이 주민들과 접촉할 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라” “차량 검문시 반드시 머리 숙여 인사하라” 등의 세세한 행동지침을 교육받았다고 보도했다.
자위대 파병에 앞서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위성방송을 통해 이라크 주민들에게 “자위대는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부흥시키러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자위대가 세계로 나아가고 있다. ‘존재하는’ 자위대에서 ‘기능하는’ 자위대로 변했고, 일본열도를 벗어나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일본이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이란 명분 아래 세계로 진출한 지 어언 13년. 1991년 4월 페르시아만 소해(掃海)활동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세계 진출 횟수 17회다. 일본만 지킨다는 ‘전수(全守)방위’에서 ‘세계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는’ 자위대로 바뀌었다. 이는 냉전 붕괴 후 국제사회에서 떨어진 일본의 전략적 가치를 회복하고 미국과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 전략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필요와 맞아 떨어졌고, “함께 중동과 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에 공헌하자”는 얘기를 듣게 됐다.
그러나 세계로 진출하려면 실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 첨단 군사기술 측면에서 자위대의 실력은 세계 최정상급이다. 90년대 초 걸프전 때 화려하게 등장했던 미 스텔스 폭격기의 필수품 중 하나가 레이더의 추적을 피하게 해주는 특수 페인트다. 이 페인트 기술이 바로 일본이 제공한 것이다. 일본의 차기지원 전투기에 장착된 능동형전자주조(Active Phased Array) 레이더는 전(全)방향의 목표물을 탐지할 수 있는 것으로 얼마 전 미국측에 기술이전이 결정됐다.
이라크전에서 송곳 같은 정확성으로 세계를 놀라게 한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에 내장된 반도체 칩도 일제인 것처럼 미사일이나 대륙 간 탄도탄 같이 정교한 신뢰성을 요구하는 군사기기용 반도체는 미국이 일본에 95% 의존한다. 500억원이나 호가하는 잠수함을 매년 1척씩 퇴역시키며 새로이 독자적으로 건조하는 나라는 일본밖에 없다. 때문에 잠수함 연령이 7.5년으로 세계에서 가장 젊다.
방어만 한다는 자위대에 ‘해외전개용’ 무기가 많아졌다. 우선 대잠초계기의 변화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냉전 시절 소련의 태평양 진출을 감시하기 위해 고정익 초계기(P3C)를 100여기 보유하고 있었으나 이제 그 후계기로 100% 국산인 차기 대잠초계기를 개발 중이다. 이 신형 초계기의 항속거리는 약 9000㎞로, 오키나와에서 말레이 반도, 유황도에서 뉴기니, 그리고 알류산 열도 등 서태평양 전역을 커버해 ‘대동아공영권’ 초계기라 불린다. 최근 도입이 결정된 공중급유기는 자위대 대외팽창의 상징이다.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을 지낸 한 인사는 “일본의 세계진출 때 미·일 동맹이 큰 도움이 됐다”고 회고했다. 이제 미국의 후원하에 일본의 군사력은 나날이 증가되고 있으며 외국들은 이를 바라다볼 뿐이다.
일본 국내 시각도 바뀌었다. 한때 경제가 어렵고 취직 자리가 없을 때 자위대 지원자가 늘었으나 지금은 다르다. 자위대 간부후보생 중엔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등 일본 유수대학은 물론, 미 버클리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이도 포함돼 있다.
지원 동기도 “입에 풀칠”이 아닌 “세계 평화에 공헌” 식으로 바뀌었다. 자위대의 위상은 “90년대 중반 이후 자위대 제복을 입고 지하철 타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다”는 야마구치 노보루(山口昇·53·육상자위대 연구본부 종합연구부장)의 발언에서도 증명된다. 여론조사 결과 자위대에 대한 일본 국민의 지지도는 1984년 35.5%에서 2004년 67.4%로 급증했다.
일본은 과거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점령·통치하고 세계대전을 일으킨 경험을 갖고 있는 나라다. 이들 일본인들이 착실한 국방력 증강과 미·일 동맹을 바탕으로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대국을 견제하면서 세계 중심국가로 위상을 제고해 나가는 과정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김경민·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