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 대표적인 저항시인 이육사(李陸史·1904~1944)가 올해로 탄신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의 고향 안동에서는 이를 기념해 지난 7월 30일~8월 3일 ‘광야에서 부르리라’는 주제로 다채로운 행사가 열렸습니다.
사실 이육사는 조선일보와 각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일보를 통해 시인으로 데뷔했고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습니다. 그의 여섯 형제 중 넷째 이원조와 다섯째 이원창도 1930년대 조선일보 기자였습니다. 육사는 형제 중 둘째입니다.
그의 형제들은 저항정신이 투철해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 때 첫째 원기, 둘째 육사(본명 원록), 셋째 원일, 넷째 원조가 모두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당했습니다.
육사는 1930년 1월 3일 첫 시 ‘말(馬)’을 조선일보에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1931년 8월부터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활동합니다. 1930년 ‘대구 격문 사건’으로 또 옥살이를 한 뒤였지요. 당시 육사가 쓴 첫 기사는 ‘대구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라는 기사였습니다.
스포츠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시인이 쓴 스포츠 기사라니 재미있네요. 1932년 3월 6일과 9일 ‘스포츠 난’에 2회에 걸쳐 쓴 ‘대구 장(나무토막이나 공을 긴 막대기로 쳐 상대편의 문 안에 넣는 민속놀이) 연구회 창립 보고서’라는 기사입니다. 그 직후 육사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납니다.
1934년 무렵 육사는 다시 조선일보 기자가 됩니다. 그는 중국에서 귀국하다 경찰에 붙잡히자 “조선일보 대구 특파원이 되어 부임 도중에 본정(本町·현 충무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1935년 재판기록)고 밝히고 있습니다.
육사는 이후에도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꾸준히 글을 발표합니다. 조선일보 폐간 후에는 자매지 ‘조광’(1942년 1월호)에 수필 ‘계절의 표정’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일부 세력이 “조선일보는 친일·반민족 신문”이라고 공격하는 지금의 한국적 상황을, 하늘의 육사는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