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identity)이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관련된 문제이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실존적 자문(自問)은 사춘기의 몫이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정체성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할 때가 있다. 당연히 그것은 사회변동이 급속하게 전개될 때인데, 예컨대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은 기존의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그때 비롯된 사회적 정체성 논란이 맺은 학문적 결실이 바로 사회학이다.
근래 포스트모더니즘 등장 이후 서구학계에서는 정체성 문제가 중요한 논쟁거리로 다시 대두하였다. 여기에서는 개인적 차원이나 사회적 영역에서 공히 정체성이 획일적이거나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가변적이며 또한 만들어지는 과정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작금에 한국정치의 현안으로 급부상한 이른바 국가정체성 논란은 이와 같은 지적 배경과 문화적 전통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무엇보다 국가정체성 논쟁의 촉발 자체가 너무나 정치적이고 인위적이다.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그리고 “이 지구상에서 대한민국의 자리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이 지금 이 시기에 여야 간의 정쟁(政爭)거리가 되어 있는 현실을 단순한 사춘기 ‘성장통(成長痛)’이라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한민국을 건강하고 성숙한 성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적 생명체 자체에 대한 훼손과 도전을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정권의 전리품으로 간주하는 권력, 그리고 과거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존재 이유를 확인하려는 권력이 개입된 국가정체성 논쟁은 애당초 국민적 공감대를 얻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만약 한나라당이, 그것도 유신체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박근혜 대표가 노무현 정권을 상대로 국가정체성 문제를 먼저 거론했다면 그것 역시 염치도 없고 효과도 없는 일이다.
한국의 국가정체성은 제국주의와 냉전체제로 점철된 20세기 역사와 세계화·정보화로 나아가는 21세기 미래를 동시에 조망하는 가운데 대내적인 차원보다 대외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과거회귀적 시비가 아닌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정체성 문제에 정답이 하나뿐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것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각오는 상대적 역사관과 다양한 미래관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全相仁 한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