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별영 군사들을 동원하여 새 왕후를 봉영하여 입궐하도록 하랍시는 어명이오!”
친위대 제1대대가 주둔하고 있는 동별영(東別營)에 나타난 일단의 사내들 중 앞에 선 자가 당당하게 외쳤다.
미심쩍은 점은 전혀 없었다. 궁중 대행사를 주관하는 사람이 반드시 입어야 할 융복 차림이었다. 왕후 민씨가 시해된 지 6일 만에 친일내각이 새 황후 간택을 황급히 추진, ‘삼간(三揀)을 거쳐서 안동김씨 가문의 규수가 새 왕후로 결정되었음’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을미사변의 충격을 줄이려는 내각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동별영 군사 800여명을 이끌고 간 가례 행사요원들은 경복궁에 닿자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입궐하여 나를 구출하라!는 대군주 폐하의 밀조(密詔:비밀 명령)가 있었다.” 지휘부는 군사를 독려했다. 공격군과 궁궐 수비군 사이의 전투는 경복궁 동쪽 협문인 춘생문(春生門)을 사이에 두고 벌어졌다. 공격군은 그러나 문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것이 ‘춘생문사건’이다. 을미년 음력 10월 12일 새벽, 실패한 친위 쿠데타였다. 을미사변으로 국권을 장악한 친일세력에 대한 군주의 반격이었지만 사건의 실체보다 후유증이 훨씬 컸고 국제적인 파문까지 일으켰다.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 조야는 기뻐 날뛰었다. 사건 당시 궁궐 안에 고종을 보호하는 미국 선교사들이 있었음을 물고 늘어져서 “일부 서양세력과 그에 결탁한 조선인들이 시도한 ‘조선 대군주 탈취사건’으로 본질상 을미사변과 같은 사건”이라고 강변하면서 매스컴과 외교 채널을 동원하여 세계 각국에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전파했다. ‘을미사변’을 물타기 하려는 일본의 시도는 효과를 봤다. 일본 사법부도 미우라 전 공사 등 히로시마로 송환되어 ‘조선 왕후 모살(謀殺)’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던 을미사변 관련자 전원을 ‘증거 불충분’이라며 석방했다.
춘생문사건으로부터 한 달여 뒤 을미년이 다 가기도 전 조선은 또다시 거대한 충격에 맞닥뜨렸다.
11월 15일(음력). 당시 국정을 운영하고 있던 김홍집 내각은 500년 조선사 최대의 개혁안을 공포했다. 태양력을 도입하고,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독립국가의 모양새를 갖추는 조치로 ‘연호’(年號)도 제정했다. 이틀 뒤인 을미년 11월 17일이 1896년 ‘건양(建陽)’ 원년 1월 1일로 바뀐 것이다. 그로부터 100년 넘는 세월이 지난 오늘날도 생일과 제사, 절기는 음력으로 챙기는 것을 생각하면 ‘양력’ 도입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짐작이 갈 바다. 그러나 양력보다 연호보다 더 실감나게 피부에 와닿은 개혁 조치는 단발령(斷髮令)이었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저 깊은 산골의 머슴에 이르기까지 조선 국민 모두 상투를 자르고 말총머리도 잘라야 한다는 단발령은 즉각 조선 사회를 바닥까지 뒤흔들어 놓았다. 을미사변의 충격이 생생하던 마당에 단발령은 타는 불에 기름을 들이붓는 것 같았다. 곳곳에서 반발이 잇따랐고 고종이 거처하던 궁 앞에는 상소문을 들고온 유생들로 하얀 바다를 이뤘다.
왜 당시 내각은 그처럼 민심이 흉흉하던 때 충격적인 개혁 조치를 취했을까.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당시 정권은 ‘개혁 강박증’에 억눌렸다. 빠르고 가시적인 성과를 원했던 그들은 서양식 짧은 머리를 개혁 내지 개화의 모습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발령은 을미사변의 참극과 치욕을 겪으면서 거세게 끓어오르고 있던 민중의 저항정신을 빠르게 결집하고 효과적으로 세력화해내는 강력한 촉매 역할을 했다.
단발령을 창안해내고 실시했던 당국자들이 원했던 것과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훗날 사가들이 ‘을미의병’이라고 이름붙인 민간 군사 집단의 궐기다. 역사의 긴 눈으로 보자면 임진왜란 때 이민족 침략자들에 대항하여 방방곡곡에서 떨치고 일어났던 의병 전통이 300년 만에 다시 강인하게 되살아난 것이다.
춘생문사건이 개화와 개혁에 대한 위로부터의 저항이었다면 을미의병은 아래로부터의 저항이었다. 고종은 의병 봉기를 반겨서 드러나지 않게 지원했다. 그러나 의병이 일어난 곳마다 관군과 일본군이 파견되어 크고 작은 격전이 잇따랐다. 무기와 훈련과 보급이 열악한 의병의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목은 자를 수 있어도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을미의병의 구호에 담긴 그 강렬하고도 단호함! 그 언사가 담고 있는 슬픔의 절박함과 급박함은 열강의 힘 겨룸을 타고 급변하는 시대에 오갈 방향을 잃었던 한 시대를 보여준다. 과연 머리카락만을 그토록 아껴서 목숨을 걸었겠는가. 전통과 자긍심의 고수, 폭력과 위압과 침략을 거부하는 정신을 ‘머리카락’이라는 단어로 표상하여 그들은 삶 전부를 걸고 투쟁했던 것이다.
(소설가 송우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