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 20세기 100년에 걸친 한국 근·현대사 재정리 작업에 나섰다.
노무현(盧武鉉) 대통령이 지난달 30일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보고를 받으면서 “지난 역사에서 쟁점이 됐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국가적 사업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힌 데 이어, 열린우리당은 1일 이를 위한 ‘진실과 화해 그리고 미래위원회’ 구성을 발표했다.
신기남(辛基南) 당 의장은 이날 기자간담회에서 “일제와 혹독한 냉전시대, 군사독재 시대의 어두운 유산을 정리하고 가야 하며, 민주개혁세력이 다수당이 아니었을 때는 이런 것을 못했으나 이제는 늦었더라도 털고 가야 한다”고 말했다. 집권 세력의 사관(史觀)과 판단에 따른 ‘한국 근·현대사 다시 쓰기’라는 점을 숨기지 않은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이런 과거사 청산 작업이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러나 행정부와 입법부를 동시에 장악한 여권이 ‘과거사 청산’을 들고 나온 이상, 당분간 정치권은 물론 나라 전체가 한국의 근·현대사라는 ‘과거’에 묶인 대형 논란을 벌일 수밖에 없게 됐다.
지난달 31일 제주도에서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공동 주최로 열린 하계 제주포럼에서 홍재형 열린우리당 정책위 의장을 상대로 한 기업인은 “여권은 과거 들추는 작업만 하지 않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여권의 과거사 청산작업을 일반인들은 ‘과거 들추기’로 인식하는 것이다.
더구나 과거사를 다루는 여권의 이중적인 태도가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할 전망이다. 우선 여권은 한 손으론 야당의 상처를 건드리고, 또 한 손으론 야당에 악수를 청하는 형국이다.
신 의장은 이날 “과거사 규명이 정쟁의 대상이나 개인적 문제는 더더욱 아니기 때문에 늦었지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고, 이를 위해 국회가 나설 때”라며 “정쟁에서 벗어나 민생경제 회복과 사회통합에 당력을 집중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여권이 추진 중인 과거사 규명 대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아버지인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 문제다. 또 한나라당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근대화·산업화 추진 세대’에 대한 재평가도 불가피하다. 결국 여권은 야당에 대해 상생과 대화를 제의하면서, 동시에 야당의 뿌리를 파헤치고 흔들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은 이미 여권의 과거사 청산 작업을 ‘노무현표 역사 세우기’ ‘나라 뿌리 흔들기’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여야의 ‘국가 정체성’ 논쟁이 이젠 한국 근·현대사 전체로까지 전장(戰場)을 확대해가는 양상인 것이다.
과거사에 대한 대외·대내의 입장이 엇갈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노 대통령은 지난달 21일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의 제주도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한·일(韓·日) 과거사 문제와 관련, “내 임기 동안에는 이 문제를 공식 의제나 쟁점으로 제기하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을 다루는 정부·여당의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간 고구려사 왜곡에 관한 정부의 입장은 ‘조용한 외교’였으나 최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관한 국민적 공분(公墳)이 커지자 ‘엄중 항의’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열린우리당 역시 아직 당 차원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있다. 한나라당 임태희(任太熙) 대변인은 “과거사 문제를 놓고 밖에 대해서는 비굴한 자세를 보이고, 안에서만 진상조사한다고 나서고 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