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월 3월부터 2004년 6월까지 서울중앙지방검찰청과 수원지방검찰청성남지청에서 ‘컴퓨터수사’를 전담하면서 국내 유수의 대기업에서부터 규모가 영세한 벤처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수의 산업스파이 사건을 수사할 기회가 있었다. 지난 6월부터는 정보통신부 자문관으로 파견 근무를 시작하였다. 그런 경험을 통하여 산업스파이 사범의 동기·수법·수사의 재판의 애로사항·법제도상의 문제점 등을 비교적 소상히 알게 되었다.
정통부 파견 근무를 시작하면서 마침 ‘기업스파이 전쟁-뚫는자와 막는자’란 책을 접하게 되었다. 필자는 그래도 국내에선 ‘산업스파이 전담검사’로 이론과 실무를 겸한 수사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내게도 이 책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것은 평면적·국지적인 것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절감하였다. 이 책은 산업스파이의 발생원인·세계적 동향·대응방향 등에 관련된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도록 도와주었고, 수사실무자의 시각과 달리 피해기업의 시각에서 산업스파이 사건을 재조명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기업스파이 전쟁’은, 사무용 라벨을 생산하는 세계적 기업인 에이버리데니슨(Avery Dennison)사의 수석연구원이던 대만 출신 텐홍 빅터 리(Tenhong Victor Lee) 박사가 8년 동안 대만의 포필러스 엔터프라이즈(Four Fillars Enterprise)사를 위해 기업기밀을 빼돌린 사건을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사건의 발생에서부터 재판종결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산업스파이의 새로운 패러다임, 국가별 산업스파이 현황, 미국의 경제스파이법 제정경위, 정보기관의 새로운 역할, 사이버보안시스템의 문제점, 미국기업의 산업스파이에 의한 피해실태, 영업기밀을 보호하기 위한 방법 등을 몇몇 산업스파이 사건과 함께 차분히 설명해 나가고 있다.
특히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진정한 세계화의 시발점으로 보면서 그 이후 산업스파이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분석한다. 즉, 세계화의 추세를 따라잡지 못하는 경제주체들이 산업스파이를 통해 이를 만회하려고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형성되었다거나, 냉전 종식과 함께 각국의 정보기관들이 새로 산업스파이 전쟁에 뛰어들고 있다거나,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시 하는 미국 정부의 태도가 미국에 대한 증오를 부추겨 미국을 상대로 한 산업스파이 활동을 더 활발하게 만들었다는 분석은 그 사실여부를 떠나서 다른 곳에서 접해보지 못한 참신한 발상으로 보였다.
그리고 “전체 산업스파이 행위의 80%가 기업의 내부 인사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정작 기업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은 복잡한 출입 시스템이 아니라 내부의 임직원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다”라는 주장이나 “정작 한 국가에 있어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는 것은 산업스파이들의 활동이다. 따라서 이들을 막기 위한 국가적 차원이 대책도 적극적으로 마련되고 시행되어야 한다. 산업스파이를 예방하고 이들의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함에 있어 가장 유능한 인력과 첨단장비가 지원되어야 한다. 국가의 수사기관에 신고를 한 기업들이 추가적인 피해를 발생하지 않기만을 불안한 마음으로 기대하는 게 아니라 당연히 신고를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말이다”라는 주장은 수사일선에 종사했던 경험에 비추어 진실로 공감가는 말이다.
이 책은 수사실무 종사자들과 기업의 CEO(최고경영자)를 비롯한 보안실무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준다.
첫째, 수사실무자들에게는 산업스파이 사범의 수사 및 재판과정에서 증거의 중요성과 수사과정에서 이미 공판전략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 또 수사실무자들로서는 소홀하기 쉬운 피해기업의 입장을 어떻게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기술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수사결과 발표 전이나 공판 과정에서 피해기업이 2차적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할 수 있는지 수사실무자들이 주의해야 할 점을 다각도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문 법조인이 사실 확정 및 양형을 하는 사법제도를 취하고 있지만 참심제나 배심제를 도입하자는 여론도 점차 힘을 얻고 있는 상황이다. 조만간 미국식 사법구조가 이식될 수도 있다. 그때는 전문법관이 아닌 배심원을 설득해 유죄를 이끌어 내어야 한다. 중요한 증거를 적시에 확보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배심원들에게 제시하여 피고인의 범의(犯意)를 입증하는 공판활동이 지금보다 더욱 중요하게 부각될 것이다.
둘째, 기업들에겐 산업스파이 사건이 터졌을 경우 그 진행경과에 따른 적절한 조치가 병행되어야 함을 일깨우고 있다. 기업의 입장에서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수사기관에 신고를 하면 피해가 더 커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산업 스파이 피해를 입은 에이버리데니슨사의 위기관리 컨설턴트였다. 그는 사건의 발생부터 종결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에 주도적으로 개입하였다. 그는 사건 초동 대응에서부터 시작하여 수사기관 신고 여부 결정은 물론 FBI(미 연방수사국)의 수사와 증거 확보 등에도 직접 관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기업의 입장에서 피고인들을 상대로 한 민사·형사 재판 대응을 진두지휘하였고, 언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를 언론에 공개할 것인지도 결정하였다.
그가 에이버리사의 직원, 협력사, 주주 등을 설득하여 추가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수사기관·언론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과정은 우리 기업들이 그대로 벤치마킹을 해도 좋을 정도로 모범적이다. “산업스파이에 의한 피해사실을 발견하여 수사기관에 신고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면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돌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특별팀을 구성하여 가동시켜라. 수사기관이 피해기업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여 수사할 것이라고 무작정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라는 저자의 말을 새겨들을 만하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산업스파이 행위를 한 가해자측, 즉 기업 비밀을 빼내 온 기업의 전·현직 임직원들의 입장에 서서 산업스파이의 발생 원인 및 대응책을 모색하는 부분이 좀 더 보강되었으면 휠씬 종합적인 그림이 그려질 수 있겠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IT강국으로 부상하면서 기업스파이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하지만 수사당국에 적발되는 것은 그 가운데 일부분에 불과하다. 검찰을 비롯한 정부기관들은 이 새로운 사회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나라 국부의 원천이 되는 핵심 산업기술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정부기관의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사자인 기업과 그 임직원 모두 산업스파이에 대해 경각심을 높이고 보안수준을 높이며 정부와 함께 협력해 나갈 때 우리의 산업기술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업의 CEO와 임원은 물론 중간 간부 이상에게 이 책은 필독서이다. 또 필자와 같이 산업 스파이 수사 담당자를 비롯하여 이 분야 정책을 담당하는 정부·관련 단체 여러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남상봉·정보통신부 정보통신 법률 자문관 파견 검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