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동현 경희대교수

운명의 십년(1895~1905)을 어떻게 볼 것인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를 거두고 민중은 동학 봉기의 실패를 맛본 뒤 조선의 역사는 가파른 내리막길을 가속 붙어 내달린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를 이루면서 세계사의 흐름에 뛰어든 일본은 이로부터 10년 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한반도를 집어삼키고 중원(中原)까지 진출하려는 야욕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게 된다.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까지 그 격동의 10년,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러시아·미국 등 열강의 각축에 조선은 어떻게 대처했는가, 100년 후 우리가 그 역사에서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 역사학자 허동현 교수가 날카롭게 해부한다.

삼국간섭(1895년 4월) 이후 러시아와 민비(후에 명성황후로 추존됨)에게 밀린 일본과 친일 개화파는 민비 시해(1895년 10월 8일)라는 만행을 범하면서까지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은 판세를 뒤엎어버렸다. 김홍집과 어윤중은 무참히 살해되었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일본인 고문관은 러시아인들로 교체되었고 러시아어 학교와 한로은행이 세워지고 이범진과 이완용이 주도하는 친러 친미의 정동파 내각이 들어섰다. 러시아가 이권을 앗아가자 미국 등 열강도 제 몫을 챙겼다. 조선은 열강들의 ‘즐거운 이권 사냥터(happy hunting ground for concessionaries)’가 되어버렸다.

모든 인간이 신분과 남녀 구1904년 러·일전쟁 중 식량 약탈을 위해 국경 부근의 한국인 마을을 습격하는 코사크족 출신의 러시아 기마병들. 프랑스 신문‘르 프티 주르날’1904년 3월 27일자에 실린 화보.

청일전쟁에서 러일전쟁까지의 10년 동안 조선 땅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의 움직임 두 가지로 독립협회 운동과 대한제국을 수립한 ‘광무개혁’을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시대적 소명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막고 근대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외세에 기대 명맥을 이으려는 왕조의 유약함은 역사 무대 전면에 새로이 등장한 독립협회(1896년 7월)세력에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신분과 남녀 구별 없이 동등하다는 민권사상, 황제까지도 법에 따라야 한다는 법치주의, 그리고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꿈꾸는 주권 수호사상을 품고 있었다.

이들의 활동으로 러시아 고문관들이 물러나고 한로은행도 문을 닫았다. 고종도 경운궁으로 돌아와(1897년 2월 20일) 조선이 더 이상 중국의 속국이 아닌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임을 만천하에 선포(1897년 8월 16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고종은 보부상 단체인 황국협회를 시켜 독립협회를 무너뜨렸다(1898년 12월). 입헌군주제 수립을 소망했던 이들의 꿈은 한낱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관을 그린 삽화.

현재 학계에선 당시 국민국가 건설이라는 과업을 완수할 주체가 누구였는지를 놓고 민권의 신장을 도모한 독립협회 세력이라는 통설에 대해 전제군주 주도하의 근대적 부국강병을 꾀한 ‘광무개혁’ 세력이라는 견해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대한제국 정부는 친러 수구의 무능한 정부가 아니라 황제권 강화,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재정 안정화, 식산흥업을 통한 상공업 진흥을 도모한 개혁적 정권이었다는 것이다.

‘국민국가 만들기’란 이상적인 잣대로 독립협회 운동과 광무개혁의 공과를 저울로 재어보자. 국민국가란 그 정치체제가 군주제든 공화제든, 민주적이든 전제적이든 간에 국가를 담당하는 주체가 국민이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백성을 국민으로 만들기보다 신민(臣民)으로 잠자게 하려한 대한제국은 진정한 의미의 국민국가로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한 국가가 국민국가인지는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미국과 일본의 카스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과 영국과 일본의 영일동맹(1905년 8월)은 ‘광무개혁’을 호평하는 이들이 그리는 자화상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고종이 거처한 경운궁이 러시아·미국·영국 대사관 옆이었다는 사실도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의심하게 한다.

영은문을 헐고 세운 독립문. 1904년의 사진.

인민들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집합개념으로 민권(people’s right)을 얻어내려 한 독립협회 운동은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의 이상을 계승한 것이자 한국 현대 민주주의 사상의 배경이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협회 운동 역시 몇 가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개개인의 개별적(individual) 권리로서 인권(불어로 droit civil)을 중시하는 오늘의 시민사회의 눈으로 볼 때, 독립협회 운동은 광복 후 우리가 겪은 권위주의 시대의 뿌리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러시아 몰아내기를 통한 주권 수호운동도 만주에 대한 지배권 확보에 부심한 러시아의 정책 변경이 가져다 준 부산물이라는 측면이 크다는 것과, 이들이 일본과 미국의 침략에는 눈을 감았다는 점도 묵과하기 어려운 흠이다.

독립협회 운동이나 ‘광무개혁’ 모두 국민국가의 필요충분조건에 미흡하다.

지금 한 세기 전 실패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실패의 책임을 외세에 묻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는 황실과 위정자들이 져야 할 십자가다. 시민사회를 운위하는 오늘, 시민임을 자각하는 모든 이들은 동일한 역사가 되풀이되는 소극(笑劇)을 연출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허동현 경희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