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TV에서 6·25전 유품을 모아놓고 ‘진품명품’을 방영했다. 무명천에 그린 54년 전의 낡은 태극기가 이 날의 최고 명품이었다. 명품을 보는 순간 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펑펑 눈물을 쏟고 말았다.
얼룩진 태극기엔 벗을 떠나보내며 마음 아파하는 죽마고우들의 친필 휘호가 씌어 있었다. ‘용사 우용암군 만세(勇士禹龍岩君萬歲)’. 마을 사람들이 우용암을 보내며 생환(生還)의 애원을 담은 부적이다. ‘충의(忠儀)’, ‘임전필살(臨戰必殺)’ 이런 격문도 씌어 있었다. 막걸리 두 말 받아놓고, 하늘이 무너져라 퍼 넘기며 살아서 돌아오라고 친구들이 그렇게 서로 돌아가며 써 주었노란다. 생존 동지(정태준)의 말이다. ‘충의’라고 써 준 벗은 전사했다. 4명만이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필자가 살던 향리에선 12명이 입대하여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3명뿐이었다.
주인공 우용암은 결혼 3일 만에 입대했다. 남편도 없는 시댁으로 들어간 부인은 한을 안고 살았단다. 그러다가 남편은 옆구리에 총상을 입고 돌아와, 성치 못한 몸으로 29년을 살다가 세상을 떴다.
“국가도 어렵겠지만 좀 도와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인 하재옥씨의 말이다. 상이군인으로 인정을 받지 못해 그동안 한푼의 보상도 받지 못했단다.
내 생각이 잘못인가. 최근사(最近史)를 둘러보면 이 밝은 하늘 아래 이런 법도 있는가 싶어진다. 국군포로가 북에 생존됨이 확인되면 연금을 중단하겠다고 정부에서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자 정부는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 무렵 그 정부는 시너 뿌리고, 불 지르고, 경찰관 7명을 숨지게 하고, 11명에게 중화상을 입힌 동의대 사건 관련자들에게 민주화 운동이란 월계관을 씌워 주었다. 그때 죽은 경찰관들은 무슨 화(化)로 인정받았으며, 또 얼마의 포상을 받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지금 이 땅은 6·25 참전용사가 자부심을 잃어가는 분위기에 쌓여 있다. 그러기에 6·25가 코앞인데 입도 벙끗하지 않는다. 방송사가 그렇고, 신문사가 그렇다. 6·25가 북침이라고 믿는 사람이 상당히 있다는 통계를 보았다.
지식인이 많아야 삶의 질이 높아지고 더 바른 소리 하는 지식인이 있어야 발전이 되는 법인데, 지금 이 나라에는 지식인이 보이지 않는다.
그날 진품명품을 지켜보던 시청자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을 터이다. 사회자의 입에서 공산당의 비위를 건드리는 말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그런 말이 나올까 싶어 보는 쪽의 마음이 더 졸였는지 모른다. 다른 것 다 두고라도 6·25 남침을 시인하는 사과 한 마디 들었으면 좋겠다. 막 퍼주어도 덜 아깝겠다.
(김영탁 수필가·서울 강남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