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산 속편=깡통’. 여태까지는 그랬다. ‘터미네이터’ ‘미녀 삼총사’ ‘툼 레이더’ 등 지극히 미국적이고, 단순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그 속편은 편수가 늘어날수록 수익도 떨어졌다. 시리즈물을 통해 부가가치의 극대화를 꾀해온 할리우드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을 터. 할리우드 메이저 제작사들이 ‘변방의 감독들’의 긴급 수혈을 받아, 어느 때보다 더 지적인 블록버스터와 그 속편들을 선보이고 있다.
올여름과 내년까지 이어질 속편에는 이런 종류의 영화와는 애초에 혈통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 독특한 취향의 저예산 B급 장르 영화나 아트 영화 감독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다. 중심부(할리우드)가 또 멕시코·이집트·호주·뉴질랜드 등 변방의 감독들에게 잇단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월드 뮤직, 노마딕(유목) 스타일 등 다양한 문화를 섭렵하는 것이 유행 코드가 되고, 또 이런 문화들이 서로 교배(하이브리드)하면서 요즘 인기를 끄는 문화상품은 국적이나 민족성을 초월하는 것이 특징이다. 뉴질랜드 B급 영화 감독 피터 잭슨이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성공시킨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올해 속편의 감독 중 가장 의외의 인물은 1972년 북아일랜드 ‘피의 일요일’ 학살을 다룬 ‘블러디 선데이’로 2002년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폴 그린그래스로 ‘본 아이덴티티’의 속편인 ‘본 슈프리머시’ 감독을 맡았다. 학살의 현장을 역으로 뒤집으면 블록버스터의 스펙터클이 된다는 것을 증명한 그의 변신은 꽤나 충격적인 사건이다.
아동물에 가까운 판타지 영화 시리즈 ‘해리포터’의 3편인 ‘해리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는 멕시코 출신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만나 좀더 어른스런 블록버스터로 변모했다. 스무 살 아이들의 적나라한 성적·도덕적 일탈을 꽤 유쾌하게 그려낸 ‘이투마마’의 쿠아론 감독은 원작자 조앤 롤링으로부터 “자구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는 너그러운 태도를 이끌어내며 라틴 문화의 향취를 영국 판타지에 녹여 넣었다. 특히 유령버스는 수년간 대중문화를 점령해온 ‘라틴풍’의 매력이 듬뿍 묻어나는 대목.
전편에 이어 ‘스파이더 맨 2’의 감독을 맡은 샘 레이미 역시 컬트 시리즈 ‘이블데드’로 사랑을 받아온 B급 영화 감독. 그는 전편에서 ‘초라한 영웅’을 그려낸 데 이어 무려 2억달러를 쏟아부은 2편에서도 학교에서 낙제하는 한심한 영웅과 자립적인 그의 여자친구 같은 파격적 설정으로 ‘헐크’의 실패로 상처받은 마블 코믹스의 자존심을 세워줄 것으로 보인다.
2000년 선댄스영화제에 내놓은 500만달러짜리 저예산 영화 ‘메멘토’로 ‘천재’라는 소리를 500만 번도 넘게 들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내년에 개봉하는 배트맨 시리즈 5편 ‘배트맨 비긴스’의 감독을 맡아 현재 촬영 중이다. ‘인썸니아’의 실패에도 불구, 그는 천재적이고도 음울한 1·2편 감독 팀 버튼과 ‘혈통’이 닮아 보인다.
‘미믹’ ‘크로노스’ 등에서 벌레에게 기이한 이미지를 부여해온 B급 영화(동시상영관에서 상영하는 저예산의 장르 영화) 취향의 멕시코 출신 기예르모 델 토로의 ‘헬보이’는 악마로 태어나 정의의 사도로 활약하는 소년의 이야기로, 마이너 출판사인 다크호스 코믹스의 만화가 원작이다. 감독은 컬트 걸작 ‘엘리펀트 맨’의 존 허트를 헬보이의 정신적 지주로 출연시키는 등 ‘B급 매니아’를 설레게 하는 설정으로 미국 평단에서 호평을 받았다. 감독은 1·2편을 잇달아 감독하기로 확정됐다.
지난 5월 영국 더 타임스도 “반역이 달아오른다―할리우드 빅 스튜디오들이 아트 하우스의 알짜배기 감독들에게 블록버스터의 속편을 맡기고 있다”고 보도했듯, 블록버스터 영화의 ‘예술 감독 선호’ 추세는 장르의 새 활로로 상당 기간 각광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변화가 ‘질’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