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랑 신부 빼놓고 결혼식장에서 주례사를 열심히 듣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몰라도 주례사에도 조금씩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부부는 일심동체(一心同體)이니 신부는 신랑의 뜻을 존중하고 신랑은 신부의 몸을 자기 것처럼 아껴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하는 ‘일심동체론 주례사’ 일색이었다. 그런데 요즘엔 고전주의적 일심동체론 주례사는 많이 줄어들고 주례 선생님의 철학과 수사학에 따라 다양한 주례사들이 나타난다.
천재적인 발상과 놀라운 학식으로 일세를 풍미해 오신 한 선생님은 전통적 일심동체론을 ‘해체’하고 ‘부부의 이심이체(二心異體)론’을 선언하는 좀 파격적인 주례사를 하신다. 신랑측 부모는 좀 안 좋아할 것 같지만 아직까지 그에 대해 불평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으니 그것은 선생님의 권위와 카리스마에 눌려서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부부의 일심동체론’이란 것이 가부장제 전통의 가면에 속하는 허구라는 것을 누구나 조금쯤은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음은 기억을 더듬어 회상해 본 선생님의 주례사의 한 부분.
“관습적으로 부부를 일심동체라고 하지만 사실 그것은 두 사람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이상주의(理想主義)적인 발언이다. 부부는 일심동체가 아니며 또 될 수도 없다. 일심동체라는 것은 한 사람의 중심 아래서 다른 한 사람이 고사(枯死)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두 사람의 타인이 만나서 부부가 되는 것이고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타인이기 때문에 부부는 이심이체라고 생각할 때 서로 잘 이해하기 위해 오히려 더 많은 노력을 하게 된다. 일심동체라는 말만 믿고 사랑을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불평만 하는 것보다는 이심이체라고 생각하면서 서로 사랑을 위해 노력할 때 오히려 이해와 화목이 이루어진다.”
선생님의 주례사는 이미 실존철학을 알고 있는 남녀 현대인들에게 매우 적절한 주례사다. 사실 부부싸움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일심동체’ 담론의 영향으로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타인이라고 생각하면 자기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고 분쟁 해소를 위한 노력을 기울일 텐데 ‘부부는 일심동체다’라고 막연히 생각하기 때문에 ‘일심동체라는데 이런 것도 안 알아줘?’라고 분노와 서운한 마음이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일심동체론 주례사와 이심이체론 주례사는 결국 사랑의 두 유형에 대응된다. 연리목(連理木) 사랑이냐, 연리지(連理枝) 사랑이냐 하는.
연리목이란 나무가 있다. 뿌리가 다른 두 그루의 나무가 사이좋게 합쳐져 한 나무인 양 자란다. 한 몸이 된 이상 수분과 영양도 함께 나누면서 그렇게 한 나무인 양 살아간다. 마치 부부가 포옹한 모습으로 보인다고 하여 옛날부터 부부의 금실을 표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말하자면 캥거루 나무다. 한 나무의 몸속을 파고들어 다른 나무가 자라는 것이다. 한국의 어머니들이 남편을 ‘또 다른 큰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각하면 한국형 결혼이 연리목 결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내 캥거루 속에 남편 캥거루와 자녀 캥거루가 사는 형상의 사랑나무다. 에리히 프롬도 ‘남자란 결국 단 몇 분 동안만 남자일 뿐 대부분의 시간 동안엔 어린 소년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서양도 마찬가지?
또 연리지라는 나무가 있다. 서로 다른 두 나무가 가지만 이어져 한 나무인 양 큰 것을 말한다. 뿌리가 다르고 몸통도 다르지만 가지가 붙어 자라는 것이다. 백거이(白居易)가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悲戀)을 애절하게 읊은 것으로 유명한 ‘장한가(長恨歌)’에 나오는 나무 이름이다. 역시 현종과 백거이는 사랑을 잘 알았던가.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기를 원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라는 구절이 있다. 연리지는 그렇게 사랑하지만 한 몸으로 밀착되는 것은 사양하고 가지만 잇닿은 사랑의 표상이다. 사랑에도 거리와 간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현종과 백거이는 알았던 것이다.
예전에는 신부 대기실에서 신부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말이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어라’였는데 요즈음엔 ‘애부터 덜컥 낳지 말고 살아 보고 애 낳아라’라고 바뀌었다고 한다. 그만큼 결혼에 대한 여성의 인식이 바뀌었고 장모의 사랑법도 바뀌었고 사랑이란 것도 객관화되고 검증이 필요한 대상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현대인의 사랑은 ‘연리목 사랑’보다는 ‘연리지 사랑’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서로의 독립과 자아 영역과 꿈을 인정할 만큼의 거리를 가진 사랑. 행복한 페미니즘이 지켜질 만큼의 거리와 존중을 가진 사랑. 우리의 딸들이 기죽지 않고 살아갈 미래의 사랑 모습!
(김승희 시인·소설가·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