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 무르익는 5월의 첫날,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토지문학공원에는 아주 특별한 도서관이 생긴다. ‘그림책 버스 패랭이꽃’. 폐차된 버스를 개조하여 온통 그림책들로만 서가를 꾸민 꼬마 도서관이다.
개관을 나흘 앞두고 ‘그림책 버스 운전사’ 이상희씨는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모양은 어찌어찌 갖췄으나 아직 서가에 꽂을 책들이 배달되지 않은 탓이다. 그래도 이씨는 싱글벙글이다. “드디어 꿈을 이뤘거든요. 이곳에서 아이들과 다리 뻗고 앉아 책 읽고 놀 생각하면 길을 걷다가도 저절로 웃음이 난답니다.”시인이면서 그림책 작가인 이씨가 버스를 이용한 도서관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4년 전이다. “조용히 글 쓰고 싶다는 핑계로 2001년 겨울 서울을 떠나 원주로 이사했어요. 처음 한 일이 이웃한 유치원에 그림책 읽어주러 간 건데, 그게 알음알음 소문나 원주 평생교육 정보관에서 엄마들을 상대로 ‘그림책 교실’을 열게 됐지요. 그렇게 만난 엄마들에게 작년 6월 원주 사람들이 다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그림책 도서관을 만들어 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건물을 따로 마련할 처지가 못됐다. 그래서 떠올린 게 버스. “버스는 우리들 서민을 한꺼번에 많이 태우고 다니는 ‘대승적’ 물건이니까요.”
그래도 ‘맨손’으로 그림책 도서관을 만드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폐차된 버스를 기증하겠다고 했다가 막상 인수하러 가면 고철 값이 아까운지 발뺌하는 일이 잇따랐다. 막상 원주시의 도움으로 버스를 한 대 구했지만, 찌든 기름때를 맨 손으로 벗겨내는 곤욕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씩 소문이 나자 도와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몇몇 출판사들은 책을 지원해 주겠다고 연락해왔고, 그가 전에 일했던 프뢰벨 출판사의 미술팀 22명 젊은이들이 원주까지 달려와 버스 바깥에 귀여운 그림책 주인공들을 그려줬다. 원주에 사는 한 시민은 버스에 가장 필요한 책장을 기증해왔다.
87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씨는 시집 ‘잘가라 내 청춘’(89년ㆍ민음사) ‘벼락 무늬’(98ㆍ민음사)를 통해 예민한 감성과 날카로운 언어 감각을 평가받은 시인. 지금은 중학생이 된 새록이가 어렸을 때 그림책을 골라 주면서 그림책 세상에 눈떴다. “좋은 시와 아름다운 명화를 함께 즐기는 감동이라고 할까요. 절제되고 함축된 언어로 이야기를 엮어가면서도 순수회화를 능가하는 색감과 디자인, 상상력에 매료됐습니다.” 그는 창작동화 ‘깡통’(2000년ㆍ문학세계)을 썼고 린다 수 박의 ‘사금파리 한 조각’(02년ㆍ서울문화사) 같은 동화를 번역해냈다. ‘작은 기차’ ‘바구니 달’ ‘나의 색깔나라’ 등 그의 손을 거쳐 아름다운 우리말로 나온 그림책ㆍ동화책이 80여권에 이른다.
“좋은 그림책은 아이들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온 가족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매체이지요. 소도시, 시골처럼 문화적 혜택을 받기 힘든 곳은 더더욱 그렇답니다.” 남들은 아이가 중학교 갈 나이면 서울이며 큰 도시로 옮겨가지만, 그는 딸 새록이가 6학년 되던 해 남편 원재길 시인과 함께 서울을 떠났다. 평생 책 읽고 책 쓰는 것밖엔 다른 소망이 없던 부부로선, 밤새도록 머리가 부서져라 시끄러운 서울을 떠나는 일이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렇게 해서 와 닿은 도시 원주에서 그는 ‘그림책 도서관’이란 새로운 꿈을 찾았고, 이제 그 첫 실마리를 풀고 있다.
버스 도서관을 완성하는 사이 이씨에겐 또 다른 꿈이 생겼다. 원주처럼 지방 곳곳에 그림책 버스 도서관이 생길 수 있게 도와주는 일! “모방송사가 지어주는 ‘기적의 도서관’은 횡재를 바라는 자본주의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는 것 같아 싫어요. 우선 패랭이꽃의 경험을 매뉴얼화해서 지방 곳곳에 계신 엄마들에게 알려주려고요. 어느 곳이든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이 들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