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권 7000원, 세트 16만1000원

7,8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친구네 사무실에 들렀다가 이제 막 나왔다는 피터 래빗 전집 그림책을 처음 봤을 때 눈이 휘둥그레졌더랬다. 섬세하고 고급스런 수채 물감으로 그려진 꼬마 토끼와 생쥐와 아기 고양이와 고슴도치와 오리와 개구리들이, 금단추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구두를 신고 앞치마를 두른 채 숲과 농장을 왔다갔다 하면서 온갖 재미나고 생생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데 넋이 나갔다.

잠깐 펼쳐보고 쓸어보고 왔는데도 그 다정한 그림들과 사랑스러운 이야기들이 내내 눈 그득히 아른거렸다. 그걸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하니 불행했다. 전집이라 도서관에서 빌려볼 수도 없었고, 그래서 그 무렵 한창 그림책에 맛들인 딸아이한테 보여줄 수 없다고 생각하니, 내 가난을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점용 단행본 피터 래빗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뛰었다. 손바닥만한 꼬마책 스물세 권이, 내 맘대로 ‘피터 래빗 컬러’라고 부르는 하늘색의 깜찍한 상자에 담겨 내 눈앞에 놓이자 귀가 다 멍멍해졌다. “오랜만이야, 피터 래빗!” 다시 만난 ‘비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 그림책 시리즈’는 전집 세트의 매혹적인 사은품이 없는 채로도 위풍당당 근사하다. 이 그림책의 첫 번째 인쇄본이 꼬마책 크기였기 때문일까. 좀 작다 싶은 크기에서 오히려 그림이 돋보이고, 작가의 세밀화 솜씨가 빛난다.

하긴 이 작가의 그림과 글은 내공이 만만치 않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스리던 빅토리아 시대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덕분에 미술교사에게 꾸준히 스케치와 편지 쓰기를 배웠다. 포터는 토끼, 생쥐, 새, 개구리, 거북, 도마뱀 등 수많은 애완동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면서 꼼꼼히 관찰하고 그렸다. 그 덕분에 그의 동물 그림은 동작 하나하나가 정확한 것으로, 그의 이야기는 동물의 생태를 올곧게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인·그림책 작가 이상희씨

줄거리 역시 짧지만 흥미진진하다. 모험심 강한 토끼 피터의 아슬아슬한 농장 탈출기를 비롯해 ‘삐딱이’ 다람쥐 넛킨의 꼬리가 잘린 사연, 생쥐들의 도움을 받아 시장님의 옷을 완성하게 된 글로스터 재봉사의 감동적인 이야기까지 다채롭고 아기자기하다.

고전의 명망을 흠내지 않고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행히도 이 번역판은 입에 딱 붙게 맛나게 옮긴 우리말이며, 각 권마다 일일이 집필 동기와 배경을 밝힌 앞 날개며, 주인공 캐릭터와 줄거리에 맞춰 문장을 뽑아 실은 뒤표지 편집이며, 공들인 디자인 모두가 세련되고 만족스럽다. 다가오는 5월 1일, 내가 사는 강원도 원주 토지문학공원에 개관하는 ‘패랭이꽃 그림책버스’에 놓아두고 아이들이랑 함께 읽고 놀 참이다. “옛날에 꼬마 토끼 네 마리가 있었습니다….”

(이상희·시인·그림책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