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대 총선이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제1당이 되는 것으로 끝났다. 한 정당이 독자적으로 과반수 의석 안팎을 확보한 것은 1988년 소선거구제 이후 처음이다. 이번 총선은 또 본격적인 좌파 이념 정당 민주노동당이 원내로 진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열린우리당의 승리와 민노당의 국회 진입은 우리나라 정치 지형의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다. 보수 정파의 수십년 국회 지배시대가 끝나고 진보·좌파 성향의 정파가 다수로 전면에 나서게 됐다. 이는 앞으로 국가 정책과 국민생활 전반에 커다란 파장을 낳을 것이 분명하다.
이제 열린우리당은 소수 정파가 아니라 행정부와 입법부의 전권을 장악한 거여(巨與)로 등장했다. 과거의 거여와는 달리 열린우리당은 수많은 시민단체,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TV 방송 및 다수 친여 신문, 갈수록 세를 확대하고 있는 노조와 진보 성향의 학계, 문화계의 직·간접 지원을 받고 있다. 우리 헌정사에 보지 못한 권력의 탄생이다.
거여의 등장으로 우리나라는 잘 될 수도 있고 잘못 될 수도 있다. 잘 되기 위해선 열린우리당이 국민 통합에 최우선적으로 나서야 한다. 열린우리당은 의석 수는 상당히 앞섰지만 정당 득표율은 과반에 미달하며 한나라당과의 격차도 아주 근소할 뿐이다.
그만큼 지금 우리 사회는 지역, 세대, 계층, 이념으로 갈라져 있다. 선거 결과 지역 감정은 과거와 겉모양만 달리 했을 뿐 여전한 것으로 드러났고 세대간의 단절은 더 심해지고 있다. 계층 및 이념문제는 자칫하면 심각한 충돌을 낳을 수 있는 상황이다. 이 나라가 통합과 조화의 쪽으로 가느냐 아니면 대결과 충돌의 길을 걸을 것이냐는 일차적으로 승자이자 국정 책임을 진 열린우리당에 달려 있다.
열린우리당이 지난 대선 때처럼 지지자·동조자들 만을 껴안고 반대자·비판자들을 적으로 돌리려 한다면 이 나라의 다음 4년은 대결과 충돌로 지새우면서 국가의 정체와 후퇴를 가져온 지난 1년을 되풀이하게 될 뿐이다.
지금 우리나라 앞에는 외교·안보·경제·사회 등 국정 각 분야에서 숱한 도전이 가로 놓여 있다. 열린우리당은 이제 국정 실패의 책임을 돌릴 곳도 없다. 잃어버린 지난 1년을 거울 삼아 오로지 냉철한 현실 인식으로 국가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하며 국익만을 추구해 나간다면 열린우리당은 우리 역사에 새로운 기점을 만든 정당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국민은 한나라당을 버리지도 그렇다고 껴안지도 않았다. 한나라당의 패인은 차떼기와 같은 부패와 구태, 그리고 무리한 탄핵 추진의 역풍을 맞은 것이지만 그래도 국민은 한나라당에 거듭날 수 있는 기회도 안겨 주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이번 선거의 선전으로 오명을 벗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한나라당의 미래는 천막 당사로 나앉은 지금의 자세를 앞으로 4년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에 달려 있다.
싸우는 것이 여당을 견제하는 것이던 시대는 끝났다. 한나라당은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의 승리는 젊은 유권자들의 변화에 대한 바람에 힘입은 바도 크다. 한나라당은 이 욕구를 이해하고 다가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민주당은 몰락했다. 그러나 50년 뿌리의 전통 정당인 민주당은 선거 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거품 정당일 수는 없다. 민주당이 지지 기반을 재건해 새로운 활로를 열어가기를 기대한다.
이제 다시 대통령 탄핵문제가 최대 이슈로 등장하게 됐다. 해법은 이미 나와 있고 어렵지 않다. 그리 머지 않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가 나올 것이다. 모두가 그 결과에 승복하면 된다. 어느 쪽이든 헌재를 압박하기 위한 시위는 자제돼야 한다.
우리 국민은 탄핵사태로 인한 심각한 국론 분열에도 불구하고 지난 1년간 보다 더 차분하게 국민된 도리를 다 했고 선거도 무사히 치러냈다. 그만큼 역량이 성숙한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빨리 우리 정치가 우리 국민만큼 성숙해지느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