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화정(南和廷·33·X-nergy 대표) PD가 ‘태극기 휘날리며’의 촬영 필름을 손에 쥐었을 때 필름 분량은 24시간에 가까웠다. 개봉 전부터 스케일로 소문난 영화답게 카메라 세 대가 찍은 엄청난 분량이었다. 그가 할 일은 24시간짜리 필름을 예고편 2분30초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핵심 장면을 고르고 음악과 대사를 가장 적절하게 깔고 띄워 관객이 빨려들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다.
남 PD가 예고편을 만든 ‘태극기~’는 1000만명 이상의 관람객을 기록했다. 그는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10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모은 영화 ‘실미도’의 예고편도 제작, 한국 영화사에 기록될 대박 영화의 예고편을 제작한 프로듀서로 각광받고 있다. “두 영화에서 2000만명 이상 들었잖아요. 다음엔 어떻게 하면 더 잘 만들까 하는 부담뿐입니다.”
지난해부터 영화 예고편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회사 X-nergy(시너지)의 공동 대표로 일하고 있는 그는 ‘이 분야에선 유일한 여자’다. 2000년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 지금까지 모두 20여편의 예고편을 만들었고, 4년 만에 정상급 위치에 올랐다.
그의 특장점은 뭘까. “한국 영화가 타깃으로 삼고 있는 층이 20대 초·중반 여성이거든요. 제가 감각을 잘 살리지 않나 싶네요.” 특별한 영상을 만들기 위해 가요든 테크노든 음악이라면 가리지 않고 듣고, 영화는 물론 뮤직비디오 등 영상물도 닥치는 대로 본다고 한다.
고등학교 땐 TV 보는 걸 너무 좋아했고, 대학(동아대 농학과) 들어가서는 떨리는 가슴으로 예술영화를 보러 다니면서 ‘영상’에 대한 꿈을 품었다. 4년 가까이 부산에서 서울로 오가며 광고 프로덕션의 문을 두드려보기도 하고, 학원강사를 하면서 세월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었다.
“답답해서 결혼이나 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하고 싶은 걸 포기할 수는 없었어요.”
그는 “영화는 어렵고, 천재들만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며 “고심 끝에 떠오른 아이디어가 예고편 제작이었다”고 말했다. 제대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해 석사과정(경성대 연극영화과)을 밟았고,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예고편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고 한다.
처음으로 영화 ‘킬러들의 수다’ 예고편을 맡게 됐을 땐 한 달 내내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장면 고르는 일에 매달렸다. 그 예고편을 본 영화사들이 연락해왔고, 지금은 여러 영화들이 줄줄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남 PD는 예고편이 흥행에 미치는 비중을 20~30% 정도로 봤다. “영화는 감독이 자신의 뜻대로 만들지만, 예고편은 철저하게 관객의 눈으로 만들어야 해요.” ‘실미도’같이 대박이 터지면 함께 작업한 사람으로서 신나지만 흥행에 참패하면 마음이 아프단다.
그의 진짜 꿈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 게 아닐까. “아뇨. 사람들은 하찮게 생각하지만 예고편은 독립된 장르예요. 앞으로는 영화뿐 아니라 TV스폿과 모바일, 인터넷 예고편도 매체에 맞게 제작하는 최고의 전문가가 될 거예요.”
그에게 ‘연봉이 얼마쯤 되느냐’고 묻자 “영화 쪽 일은 돈을 따지면 오래 못해요”라며 수줍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