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가격을 연구하다 보니 조선 시대도 서구적인 의미의 회계 기록을 남긴 합리적인 사회더군요.”
미국 국립과학재단(NSF)의 연구 지원 대상으로 선정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전성호(全成昊·42) 책임연구원(경제학 박사). 그는 특이하게도 조선 시대 쌀 가격 연구로 미국의 연구 지원을 받게 됐다.
자신이 참여한 ‘세계 물가 및 소득 추계’(1200~1950년)라는 다국적 프로젝트가 올해 NSF의 자금 지원 대상에 선정되면서 수혜 대상이 됐다.
이 프로젝트는 캘리포니아주립대(UC Davis) 피터 린더트 교수가 주관하며 전 세계 학자 15명이 참여하고 있다.
린더트 교수팀은 2002년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국제경제사학회에서 전씨가 발표한 조선 후기 쌀 가격 추이 연구 논문을 듣고 프로젝트 참여를 권유했다고 한다. 전 박사가 맡은 부분은 과거 아시아 물가 중 한국의 물가를 추정하는 작업이다.
전씨는 “일본은 이미 1960년대에 과거 물가 데이터를 구축 발표했고, 중국은 1992년 물가 데이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성균관대 81학번인 전씨는 대학 때 소위 ‘극렬 운동권’이었다고 한다. 1983년 광주민주화운동 3주년 기념 시위를 주도하다 1년간 투옥된 후 수원의 한 골판지 공장에 ‘위장 취업’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손에 이끌려 복학, 처음으로 한국학을 접하면서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국학 교육의 전당인 ‘지곡(芝谷)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외우기 시작, 대학원에서는 경제사를 전공으로 잡고 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 등 고서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90년대 중반 우연히 경상도 고성 지방의 ‘승총명록(勝聰明錄)’이라는 개인 일기를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시대 물가 연구에 들어갔다.
전씨는 “일기 저자는 1725(영조1년)~1761년(영조37년) 사이 쌀값을 매일같이 기록해 놨다”며 “왕조실록 등 관편 자료에서 얻을 수 없는 연속성 있는 자료여서 그때서야 물가사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고문서 영인본을 뒤지다 1741년(영조17년)부터 250년간 쌀가격·금리·토지가격 등이 복식부기와 유사한 방식으로 정리된 전남 영암의 남평 문씨의 대동계 회계장부 ‘용하기(用下記)’를 발견하기도 했다.
전씨는 “대동계는 ‘강신(講信)’이라는 현재의 주주총회와 비슷한 총회를 열었다”며 “이는 조선시대 회계장부가 감사를 거쳤다는 증거로 데이터의 신뢰성이 높다는 걸 증명해준다”고 말했다.
1998년 두 문서를 기초로 쓴 논문 ‘조선 후기(1725~1875년·영조1년~고종12년) 미가사(米價史) 연구’로 성균관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후 조선시대 물가 관련 논문을 계속해서 발표하고 있다.
전씨는 “당장 결과가 안 보이더라도 기초학문 지원은 중요하다”며 “국내 재단에서도 기초학문 연구에 대한 관심을 보다 많이 기울여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