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하고 우울한 '신문의 날'이다. 지금 신문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대통령은 언론을 우군(友軍)과 적군(敵軍)으로 양분하여 비판적인 신문을 노골적으로 폄하했고 소송을 제기하면서 핍박했다.
공룡처럼 비대해진 방송은 권력의 편에 서서 특정 신문을 집중적으로 매도한다. 신문의 논조를 약화시키려고 혈안이 된 사이비 개혁론자들은 왜곡된 논리를 퍼뜨리면서 친정부매체를 활용하고, 무리를 지어 물리력으로 신문에 위협을 가한다.
권력을 견제하는 일이 지식인의 오랜 덕목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제는 권력의 편에 서서 신문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세상이 되었다. 독약 바른 화살을 권력이 아니라 신문을 향해 쏘면서 "권력은 약자이고, 신문이 권력"이라고 강변한다. 이런 신문의 날은 이전에는 없었다.
과거의 신문은 대중의 지도자였다. 국가의 진로를 제시하는 선지자(先知者)였다.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호민관(護民官)이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 선생이 독립신문을 창간한 이후 '황성신문'의 남궁억(南宮檍)과 장지연(張志淵), '뎨국신문'의 이종일(李鍾一), '대한매일신보'의 양기탁(梁起鐸)과 영국인 베델(裴說:E.T.Bethell), 그리고 '만세보'의 오세창(吳世昌) 등은 기우는 국운을 일으켜 세우고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이들은 이번 신문 주간에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이름이 오르는 사람들이다.
신문은 탄압을 받으면서 자랐다. 100년 전 러·일전쟁이 일어난 때로부터 일제의 검열에 시달렸다. 기사와 논설이 깎인 상처를 지면에 그대로 남긴 누더기 신문을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언론인들이 구속되고 투옥되었다. 그런 가운데 일제 치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인재들의 집결처가 되었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문인과 예술가들이 신문사의 울타리에 모였다. 광복 후에는 정치인·문인·학자로 활약하는 많은 사람들이 신문사에 몸을 담았고 거쳐갔다.
이와 같은 한국 언론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바삐 돌아가는 신문 제작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성찰의 시간을 갖자는 취지를 지닌 것이 신문의 날이다. 1957년, 자유당의 독재가 국민의 원성을 사던 시기였다. 민족의 수난기, 엄혹한 독재 정권 하에 발행된 신문에 잘못된 부분이 어찌 없겠는가. 신문의 날은 신문 발행을 하루 중단하고 언론인들이 자신을 돌이켜 보는 반성의 날이면서, 현대사의 격랑을 헤치면서 국민과 함께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왔다는 자부심을 지닐 수 있었던 축제의 의미도 있었다.
오늘날 신문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방송과 인터넷 매체, 통신 등의 급격한 기술 발달로 과거에 신문이 담당하던 정보 전달과 여론 형성의 기능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것이다. 경영면에서도 신문의 수익성은 떨어지고 있다. 공짜로 볼 수 있는 무료신문만 잠시 훑어 보고 신문을 멀리하는 사람도 있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는 젊은 층들도 많다. 길거리에 흩날리던 호외(號外)를 주워 보던 일도 까마득한 추억이 되었다. 속보경쟁은 이미 방송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가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정도(正道)를 걷는 신문의 역할은 막중하다. 서재필 선생의 독립신문은 개화의 기치를 내걸고 이 나라의 모든 구습(舊習)을 바로잡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천명했다. 정부와 관리들의 비리를 폭로하고 사사(私私) 백성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말할 것이라고 창간사는 밝혔다. 어느 당에도 상관하지 않고 상하귀천 구별없이 조선 백성을 위해 신문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불법이 횡행하는 세상에는 용기있는 신문이 빛을 발한다. 불의에 맞서는 신문, 국민과 함께 민주화의 장정(長征)을 걸어온 신문이 건재하는 한 나라의 장래는 어둡지 않다.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