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그렇다. 결단코 이 날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3월 12일을 민주주의의 국치일로 만들고, 우리 정치를 군사독재 시대로 되돌려버린 의회 쿠데타의 이 날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정대화(鄭大和) 상지대 교수가 대표적인 친노(親盧) 사이트에 기고한 글이다. 그는 대통령 탄핵안 가결일을 ‘국치일(國恥日)’이라고 명명했다. 탄핵 가결을 주도한 야당 정치인 다섯명을 ‘갑신오적(甲申五賊)’이라 부르며 “앞으로 국민들이 그대들의 죄상을 일일이 열거해 줄 것”이라고도 했다. 나라가 외세에 침탈당한 듯한 비감함이 서려 있다. “이 날을 기억하겠다”는 말은 주로 ‘지금은 힘없는 자’가 정의가 승리할 훗날을 기약할 때 쓰는 표현이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민주화 세력이 골방에 숨어 벽에 새기던 절치부심의 다짐이다.
광장에선 연일 촛불 시위가 벌어진다. 시위는 ‘권력에의 저항’을 상징하지만, 시위 참가자들과 공권력 사이엔 어떤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다. 집회를 꿰뚫는 구호는 탄핵반대다. 구체적으론 ‘대통령을 탄핵한 야당의원 193명을 심판하자’는 것이다. 집회 주도세력이 준비한 팻말엔 ‘근조 개나라(한나라)’ ‘한민당 내 죽어서도 너를 용서치 않으리라’ ‘미친 개 193마리에 국민의 심판을’ 등의 반야(反野) 구호들이 즐비했다.
의문사진상규명위는 탄핵안 가결을 규탄하는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서명에 참여한 위원들은 “어떤 불이익과 처벌도 감수하겠다”고 했다. ‘시국선언문’과 ‘불이익 감수’라는 단어들 역시 20여년 전 시대상황을 연상케 하는 패키지다. 권력 한복판에서 권력을 고발하면서 그 이후에 다가올 냉혹한 반대급부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메시지가 거기 있었다. ‘그들의 용기와 나의 비겁함’에 보는 이들은 가슴 시려지곤 했다. 의문사 위원회의 비장한 각오에 자극을 받은 탓인지 공무원 노조도 ‘용기있는 행동’에의 동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대통령 직속기구 소속원들과 공무원들이 ‘대통령 탄핵을 규탄하는’ 선언문을 발표하는 행위에 얼마나 대단한 불이익과 처벌이 따를 것인지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TV 방송들은 자신들이 언론 탄압을 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연일 내놓고 있다. 언론 탄압은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비판 보도로 인해, 언론사 또는 그 소속원들이 구체적이고 현존하는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사용해 온 말이다. 그러나 방송을 ‘탄압’한다는 주체는 구석에 몰리고 있는 두 야당이고, 방송에 가해진 위협은 “출연 거부도 불사하겠다”는 정치인으로서는 자해(自害) 공갈에 해당하는 비명이었다. 국회 의석 3분의 2를 과점한 야당들도 권력은 권력일 것이다. 그러나 하필 총선까지 한 달도 안 남은, 그것도 두 야당의 합산 지지율이 여당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시점에 와서야 ‘야당의 언론 탄압론’이 나오는지가 아리송하다.
시국선언, 언론탄압, 국민심판, 촛불시위…. 한결같이 현재의 막강한 권력에 맞서는 약자의 비장한 언어들이었다. 혹은 공동체 전체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敵)을 겨냥한 외마디 함성이었다. 그러나 지금 거리에서, 방송에서, 인터넷에서, 관가(官街)에서 터져 나오는 함성들이 상정하고 있는 공공의 적(敵)은 바로 소수로 몰린 두 야당이다. 대한민국에선 친여(親與) 연합 세력의 대야(對野) 투쟁이 진행 중이다.
(김창균 정치부 차장대우 ck-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