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비누’ 같은 것도 명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상 안의 작은 소품들 하나하나가 모두 시의 소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비누’일까? ‘비누’는 몸을 씻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이며, 쓸수록 닳아져서 소모되는 물건이다. 세상의 사물들이 결국은 모두 사라지지만, 비누처럼 그 사라짐의 과정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사물도 드물다. 그러니까 비누는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긴 시간의 과정을 압축해 놓은, 그런 물건이다.
시인 이승훈은 ‘비누’ ('비누', 고요아침)에서 비누의 그러한 특성을 말한다. 이 시에서 비누는 ‘가랑비’가 되기도 하며, ‘하얀 눈발 어둠 속’에 있거나 ‘마루’, ‘거실’, ‘화장실 거울’, 그리고 ‘추운 밤 깊은 산 속’에 있기도 하다. ‘비누’가 다양한 공간으로 옮겨다님으로써 비누라는 친숙한 일상적 사물은 문득 낯선 것이 된다. 요컨대 비누는 어떤 것도 될 수 있으며, 어디에도 있고 또한 어디에도 없다. 이 불교적인 화법은 비논리적인 문장들의 배치를 통해 표현된다. ‘씨앗’도 ‘열매’도 아닌 비누는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추운 밤 깊은 산 속에 앉아 있는’ 비누는 혹시, 그대와 떠났던 그 길에 두고 온 것이 아닐까?
그러니 이 시에서 그 논리적 의미를 찾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이 자명한 진실. 시인의 다른 표현을 빌리면 ‘비누의 길이 삶의 길’이라는 것. 비누가 매일 닳아 가는 것처럼 생은 매일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
(이광호 문학평론가·서울예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