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발발현장: 120년 전 갑신정변 발발의 현장이었던 우정총국의 현재 모습. 120년 세월 저편의 그곳은 피바람을 일으켜서라도 단숨에 국가 개혁을 이뤄내겠다는 개화당의 열망이 불탔던 곳이다.

동지에서 적으로. 갑신정변의 배경에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파 4인’과 민씨 척족(戚族)의 젊은 거물 민영익의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다.

개화운동의 주동 세력이었던 김옥균 등은 민비(閔妃)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민영익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지만, 그가 청(淸)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독자적인 길을 걷기 시작함에 따라 개혁을 넘어 혁명을 선택한 것이다. 개화파의 리더 김옥균(金玉均·1851~1894)이 홍영식(洪英植·1855~1884), 서광범(1859~ 1897), 박영효(朴泳孝·1861~1939) 등 훗날의 동지들을 만난 것은 1870년대 중반 ‘개화파의 스승’ 박규수(朴珪壽·1807~ 1876)의 사랑방에서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손자로 평안감사·우의정을 역임한 박규수는 1872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눈을 떴고, 1874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젊은 관리와 집권층 자제들에게 개화의 필요성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이들은 모두 명문 출신이었다. 김옥균은 강릉부사를 지낸 안동 김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1872년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한 엘리트 관료였다. 홍영식은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의 아들로 1873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에서 근무했다. 서광범은 이조참판을 지낸 서상익(徐相翊)의 아들로 1880년 문과에 급제했다. 가장 지위가 높았던 박영효는 철종(哲宗)의 부마(駙馬·사위)로 왕실 가족이었다. 민영익(閔泳翊·1860~1914)은 1877년 과거에 급제하여 정계에 진출하면서 개화파를 만났다. 민비의 오빠로 민씨 일파의 수장(首長)이었던 민승호의 양자 민영익은 고종과 민비의 특별한 기대를 받은 ‘황태자’였다. 민영익과 김옥균 등은 새로운 국가 모델을 ‘개화’에서 찾으면서 급격히 가까워졌다. 외교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민영익은 일본·중국으로 잇따라 개화 시찰단을 파견하고, 각종 정부기구 개편과 신문 발행·차관 교섭·유학생 파견 등 급물살을 탄 근대화 움직임에서 개화파의 외교·경제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러나 민영익은 1884년 5월, 10개월에 걸친 미국·유럽 시찰을 마치고 귀국한 후 개화파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개화파가 청으로부터의 자주를 외치면서 일본에 기대어 개화를 추진하려는 것과는 달리 민영익은 청(淸)과의 유대를 강조했다. 그해 10월 군권(軍權)을 장악한 민영익은 일본식 교육을 받은 사람들을 군에서 축출하는 등 개화파 활동을 제약했다. 그로부터 김옥균 등과 민영익은 ‘함께 국사(國事)를 논의할 수 없는 사이’(미국공사관 퍼어크 무관의 보고)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