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는 것’과 ‘만나서 느끼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재작년 가을 한국에 온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代母)’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국의 여성들을 흥분시켰다.
그가 70세의 할머니란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 인조 가죽바지는 군살 없는 그의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고, 강연장에 몰려든 여대생들은 스타이넘의 화술에 매료됐다. 작은 질문도 귀 기울여 듣고, 적절한 유머를 섞어 상대가 충분히 납득하게끔 설명하던 모습. “왜 아기를 갖지 않느냐”는 질문에 “자궁이 있는 모든 여성이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말은 성대를 가진 모든 사람이 오페라 가수가 돼야 한다는 말과 같다”고 한 스타이넘의 대답은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스타이넘의 전생애를 담아냈으면서도 업적보다는 내면 풍경의 변화를 치열하게 그려낸 이 책은, 그래서 더 흥미진진하다. 특히 오늘의 스타이넘이 있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그의 모계혈통과 불우한 유년시절은 인상적이다. 딸들에게 직업을 갖고 혼자 살라고 권유한 외할머니와 여성참정권을 주장한 운동가 출신의 친할머니. 영리했으나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던 어머니와 낙천적이고 방랑 기질이 강했던 아버지 밑에서 겪은 빈곤은 스타이넘으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적응력, 다른 사람들에 대한 포용과 더불어 인습적인 삶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갖게 했다.
놀랍게도 이후로 펼쳐지는 스타이넘의 생애는 그가 10대에 다져놓은 바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엘리트만 모이는 스미스 여대에 들어가서는 친구들에게 다림질을 가르쳐주었을 만큼 개성을 잃지 않았고, 연애는 하되 여성을 인습에 묶어두는 결혼만큼은 그가 66세에 인권운동가 데이비드 베일과 미국 인디언 체로키족(族) 풍습에 따라 ‘평등한’ 부부가 되기 전까지 단호히 거절했다.
대학시절 첫 애인과의 사이에 생겼던 아기를 낙태수술한 후 스타이넘이 1년을 보낸 인도에서의 생활에도 저자는 깊이 주목한다. 카스트 제도로 고통받는 인도 여성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눈뜬 전세계의 동일한 여성문제! 비폭력을 내세운 간디식 평화투쟁이 여성운동에 적합하다는 것도 거기서 얻은 깨달음이다.
동료 페미니스트들에게 더 공격받았던 자신의 외모를 극복해가는 과정도 인상적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믿고 사랑했던 스타이넘은 미니 스커트를 입고 붉은 립스틱을 바르면서 자신이 여성이란 사실을 즐겼다. 오히려 저자는 ‘성적인 매력과 뛰어난 지성, 자신을 낮추는 대화 기술로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남자들을 주눅들게 하고 또 끌어들였다’고 증언한다.
물론 책에는 플레이보이 클럽의 바니걸로 위장잠입해 하층 여성들의 삶을 폭로한 기사로 세상을 들썩이게 한 무용담, 분신이나 다름없던 페미니스트 잡지 ‘미즈’의 대성공, 혈육이 아닌 아이들을 데려다 키우며 모성(母性)의 개념을 바꿔놓은 스타이넘의 ‘발칙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상세히 소개된다.
그러나 이 전기의 가장 큰 미덕은 스타이넘을 우상으로 남겨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페미니즘 전도사로 불렸던 스타이넘이 사실은 대중 앞에 나설 때마다 지독한 공포에 시달렸다는 ‘진실’은 여성혁명의 진수로 추앙받는 그를 친근한 이웃집 언니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저자는 또 스타이넘이 우정을 나눴던 남자들, 특히 아버지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많은 분량을 할애해 이 책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다. 공상가였고 비권위적이었으며 뭣보다 어린 딸의 생각을 존중했던 아버지. 스타이넘으로 하여금 “여성성이란 없다. 인간성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기게 한 주인공은 바로 그 가난하고 자유로웠던 아버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