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모르면 간첩’ ‘내 사랑 싸가지’ 등 올해 나온 충무로 로맨틱 코미디 두 편의 완성도는 야구에 비유한다면 병살타나 삼진 아웃에 해당할 정도로 볼품없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들이 엄청난 흥행 이어달리기를 하는 올 초 극장가에서 이제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는 실효가 다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에서 3번 타자로 타석에 선 ‘그녀를 믿지 마세요’(20일 개봉)는 깔끔한 완성도로 호쾌한 적시타를 날린다. 이전 주자가 진루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 영화 한 편으로 승부를 뒤집을 순 없겠지만, 로맨틱 코미디가 여전히 매력적인 장르란 사실 자체는 충분히 입증했다.
가석방된 천재적 사기꾼 영주(김하늘)는 유일한 혈육인 언니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탄다. 몇차례 우연으로 앞 좌석에 앉은 시골 약사 희철(강동원)의 반지를 갖게 된 그는 그 대신 자신의 가방을 잃어버린 채 희철과 헤어지게 된다. 희철의 가족들은 그의 반지를 가진 채 시골 마을까지 찾아온 영주를 보고 애인으로 오해한다. 가석방 상태라서 적극적으로 진실을 밝힐 수 없는 영주는 내친 김에 희철 약혼자 행세를 하며 나중에 돌아온 그를 곤경에 몰아넣는다.
억지 개그와 졸렬한 화장실 유머로 범벅된 충무로 코미디가 줄을 잇는 현실에서, 절묘하게 짜놓은 상황 속으로 인물들을 밀어넣어 유쾌한 웃음을 선사하는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신선하다. 거듭된 우연과 황당한 상황이 이어지는데도 억지스럽게 느껴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리얼리티를 확보한 채 푸짐한 코미디 마당을 만드는 작법은 근래 로맨틱 코미디 중 최고 수준이다. 연출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코미디의 리듬을 잃지 않는 카메라 워크나 편집도 좋다. 이 영화는 유머가 멜로와 맞교대하는 지점에서도 ‘진실 게임’처럼 작품 상황에 절묘하게 합치하는 모티브를 끌어들여 관객의 심리적 파장을 극대화시키는 위력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샌드라 불럭의 ‘당신이 잠든 사이에’를 떠올리게 하는 사랑 영화지만, ‘집으로’나 ‘선생 김봉두’처럼 시골과 가족 및 잃어버린 휴머니즘을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밑그림도 충분히 따뜻하다. 이 영화를 통해 카메라를 사로잡는 매력을 제대로 발산한 김하늘 연기의 질과 비중은 ‘선생 김봉두’ 차승원의 경우에 견줄 만하다. 영화에 처음 모습을 보인 신인 배우 강동원도 첫 단추를 제대로 끼웠다.
극중 영주는 “거짓말은 고도의 지능게임이야. 기억력에 순발력까지 있어야 하고, 앞뒤 얘기도 다 맞춰야 하니까”라고 설명한다. 어차피 로맨틱 코미디는 ‘달콤한 거짓말’일 터. ‘그녀를 믿지 마세요’는 달콤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로맨틱 코미디의 본질을 제대로 꿰고 있는 드문 영화다.
(이동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