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저녁(현지시각) 개막한 제5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가 개막 초반 정치적 소재를 다룬 영화들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칸·베니스와 함께 세계 3대 국제영화제로 손꼽히는 베를린 영화제는 전통적으로 ‘사회파 영화’들이 강세를 보이는 영화 축제. 올해는 남아메리카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지구촌 각지의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다룬 영화들이 예년에 비해서도 유달리 많아 베를린영화제의 정체성을 강렬히 드러내고 있다. 디터 코슬릭 베를린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영화제 개막 직전 “이제 10주년이 되는 남아공의 인종분리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종식과 남미의 빈곤 문제가 올 베를린 영화제를 이끄는 이슈가 될 것”이라고 언론에 밝혔다.
공식경쟁부문 진출작 중 줄리엣 비노쉬와 새무얼 잭슨이 주연한 영국 감독 존 부어맨의 ‘컨트리 오브 마이 스컬(Country Of My Skull)’은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남아공의 현실을 미국 기자의 시선으로 다뤘다. 남아공 최초의 자유선거를 다룬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들도 영화제 기간 중 상영된다.
미국 감독 조슈아 마스턴의 ‘은총의 마리아(Maria Full Of Grace)’는 마약과 폭력이 판치는 콜롬비아를 무대로 농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17세 소녀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렸다. 아르헨티나 감독 다니엘 버먼의 ‘잃어버린 포옹(El Abrazo Partido)’도 남미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영화다. 올 베를린 영화제는 남미 기록영화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정치 다큐멘터리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의 아르헨티나 거장 페르난도 솔라나스에게 평생공로상을 줌으로써 남미 영화인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코슬릭 집행위원장은 “남미 인구의 45%가 극빈층인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영화를 통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지역 외에도 유고슬라비아 내전 기간의 전쟁범죄를 다룬 크로아티아 감독 빙코 브레산의 ‘증인들(Witnesses)’, 미국인 아버지를 찾아나선 베트남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베트남전이 남긴 상흔을 다룬 노르웨이 감독 한스 페터 몰랜드의 ‘아름다운 나라(Beautiful Country)’, 스페인 내전을 무대로 한 프랑스 감독 에릭 로메르의 정치 스릴러 ‘트리플 에이전트(Triple Agent)’ 등 많은 영화들이 현대사의 비극적 전쟁들을 다루며 날카로운 역사·정치적 감각을 드러냈다. 혁명가 체 게바라가 청년 시절 남미 각지를 다니면서 빈곤을 목도하고 좌파 사상을 확고히 갖게 될 때의 여정을 되밟아간 이탈리아 감독 지아니 미나의 다큐멘터리 ‘체 게바라와의 여행’도 주목받고 있다. 한편 5일 개막식 때는 붉은 카펫이 깔린 베를린 마를레네 디트리히 광장 앞에서 최근 독일 정부의 교육 예산 삭감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행진을 벌여 행사가 차질을 빚기도 했다.
개막일에는 미국 영화 ‘콜드 마운틴’을 오프닝 영화로 상영했지만 니콜 키드먼, 주드 로 등 주연 배우들이 참석하지 않아 영화제 출발은 ‘썰렁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잭 니컬슨, 다이앤 키튼, 케이트 블랜쳇, 줄리엣 비노쉬 등의 연이은 방문으로 영화제는 이내 활기를 찾았다.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서 60대의 잭 니컬슨과 30대의 키아누 리브스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연기한 다이앤 키튼은 “둘 중 누가 키스를 더 잘하느냐”는 질문에 “의심할 바 없이 잭”이라고 답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파란 대문’ ‘나쁜 남자’에 이어 세 번째로 베를린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김기덕 감독의 원조교제 소재 영화 ‘사마리아’는 10일 공식 상영된다. 올 베를린 영화제는 15일 폐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