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말, 밀레니엄의 대전환을 앞두고 ‘지난 1000년 동안 최고의 ○○는?’을 선정하는 게 유행한 적이 있었다. 예컨대 뉴욕타임스의 ‘최고의 지도자―엘리자베스 1세’ ‘최고의 사기극―십자군전쟁’ 식이다.

미국 저술가 브록만이 노벨상 수상자를 포함해 세계적 지성 12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지난 2000년 동안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 조사도 그 중 하나였다. 보온병, 지우개, 복식부기, 건초, 무의식, 상하수도, DNA, 교향악단, 철학적 회의주의, 미적분, 의문문, 숫자 0, 피임약…. 한 사람이 하나씩 꼽는 조사에서 실로 백인백답의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그 속에 다섯 사람 이상이 공통적으로 꼽은 발명품이 두 개 있었다. ‘인쇄 기계’와 ‘컴퓨터(인터넷)’다. 이런 유(類)의 설문 조사가 의미있는 것은 답변 과정을 통해 응답자의 문명관과 함께 그가 사는 시대의 분위기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마침 그해 국내에서도 일반인들을 상대로 한 비슷한 조사가 있었다. ‘지난 1000년 최고의 발명품’에 전화, ‘20세기 최고의 발명품’에 컴퓨터가 각각 뽑힌 것은 우연일까? 인쇄기계와 전화와 컴퓨터(인터넷)의 공통점은 다른 사람과의 소통(커뮤니케이션)과 관련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보는 눈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연구팀이 최근 미국인들을 상대로 “가장 싫지만 없으면 살 수 없는 발명품”을 묻는 질문에 ‘휴대전화’가 30%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 이어서 자명종, 텔레비전, 면도기, 전자레인지, 컴퓨터, 자동응답기 등의 답변이 나왔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이 질문 문안의 비중(比重)은 ‘없으면 살 수 없는’보다는 ‘싫지만’ 쪽에 실린 것 같다. 사람이든 기계든 타자(他者)로부터 간섭받지 않는, 속도의 중압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꿈꾸는 21세기인들 모습을 이를 통해 읽는다. 핵심은 과도한 커뮤니케이션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욕구다.

미국보다 휴대폰 보급률이 압도적으로 높고 기술과 디자인이 앞서간다는 한국에서 똑같은 조사를 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곤혹스러운 것은 우리들은 독선과 아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남과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넓히면서, 한편으론 과부하(過負荷) 상태의 커뮤니케이션 부담으로부터도 해방되고 싶은 이중의 욕구를 안고 산다는 사실이다.

(김태익 논설위원 ti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