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시인을 단 하나의 별칭으로 호명(呼名)하는 일은 그의 문학적 전 인격을 농단하는 사디즘과 관계돼 있다. 이 피끓는 욕망 때문에 평론가 김용희(41)는 겨울의 한가운데 새벽잠을 털어낸다.
허수경을 주모로, 김혜순을 마녀로, 강신애를 기생으로, 조말선을 마조히스트로, 나희덕을 수녀로, 김명리를 주술사로 부르고 싶어서 그 긴 밤을 어떻게 참았을까 싶은 시 읽기다.
‘페넬로페의 옷감짜기-우리시대 여성시인’(문학과지성사 펴냄)이라는 200쪽이 채 안 되는 문고판에서 그는 13명 여성 시인들의 대표작이 돼버린 시 몇 편을 인용하고 자신이 제시한 별칭의 근거를 제시한다.
김용희는 허수경의 ‘폐병쟁이 내 사내’라는 시를 읽은 뒤 그녀를 주모라고 부른다. 남강 강변에 주막을 차린 허수경은 도회의 폐병이 들린 사내를 맞아 “피 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을 거두어주고” “허벅살 선지피라도 다투어 먹”인다는 것이다.
허수경은 세상 남정네의 어머니로서 주모가 된다. 김용희는 김혜순의 시를 ‘마녀의 언어’라고 규정한다. 김혜순은 ‘누구에게나 반말을 까발리면서 첨예한 의식의 극단으로 치를 떨고 살의를 띤 섬뜩한 웃음을 웃어젖힌다’는 것이다.
“배고픈 죽음이/ 또다시 뒷발 들고/ 우뚝 서서 포효하고”(‘내 시를 드세요’), “달은…/ 보리밭에 머리 처박고 가랑이 벌린/ 밤처녀의 혼령을/ 웃으며 빨아먹”(‘달’)는다는 등의 구절을 솎아 놓는다.
과격한 호명을 불사하는 김용희의 목표는 “남성의 시각에 따라 이분법적 분류에 갇혀버린 여성 시인들을 구출하려는 것”이다. ‘위대한 어머니’ 아니면 ‘위험한 창녀’라는 무차별적 이분법을 벗어나 “여성 속의 무수한 정체성을 불러내고 싶었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강신애가 기생으로 불리는 까닭은 ‘정숙한 관능의 발설법’ 때문이다. 가령 강신애는 시 ‘아름다운 뿔’에서 “오늘밤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아름다운 뿔에 찔려/ 영원한 흉터를 지니고 살아간들 어떻겠어?”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사랑은 부재와 존재의 간극에 있’으며, 그 때문에 ‘기생은 언제나 부재하는 임을 기다리는 정념의 여인’이 된다는 것이다.
조말선을 마조히스트라고 부른 김용희는 “(그녀의 시는) 가부장 체제에 대한 분노”를 삭이면서 “찢기고 매맞음으로써 제2의 탄생을 원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나희덕은 대표작 ‘어두워진다는 것’을 통해 “구도를 향해 가는 수녀”로 불린다. “정신적 초월에 대한 지향과 박애적 사랑”은 신을 향해 간구하는 수녀를 닮았다는 것이다.
김용희 자신은 그럼 누구라고 불려야 할까. 낮에는 옷감을 짜고 밤에는 짠 옷감을 몰래 풀어야 하는 운명. 그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페넬로페다. 여성의 글쓰기는 그렇듯 “억압과 갇혀 있다는 자각 때문에 형성되기를 끝없이 거부하면서 써나가는 글쓰기”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