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그만 되돌아갈까 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해안으로 데리고 가서 팔아버릴 것이라고 이곳 주민들이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백인은 식인종이기 때문에 우릴 배에 싣고 가서 살 찌운 다음에 잡아먹어 버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19세기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를 탐험할 때 원주민인 그의 안내원들이 했던 이야기입니다. 당시 일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을 식인종으로 여겼지만, 아프리카인들 입장에선 정반대로 백인을 식인종으로 생각했던 거지요.

16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브라더 베어’는 곰에게 희생된 형의 원수를 갚으려다 신비한 힘에 사로잡혀 진짜 곰이 되어버린 키나이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엄마를 잃은 아기 곰 코다와 동행하게 된 키나이는 어느 날 거대한 곰과 싸우는 인간 모습을 그린 벽화를 보게 됩니다. 그때 옆에 있던 코다가 말하지요. “정말 무서워. 저 창을 든 괴물 말야.” 그 벽화에서 인간은 곰보다 훨씬 더 작았는데도 말이지요.

대상을 바라보며 판단할 때 중요한 것은 종종 시선을 가진 자가 서 있는 위치입니다. 똑같은 일들을 겪고도 ‘오!수정’의 남과 여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달리 기억하고, 똑같은 상황에 놓였어도 ‘라빠르망’의 세 남녀는 결국 동상이몽을 꾸고 말았으니까요.

영화 ‘스워드피쉬’의 초반부에서 천재적인 악당으로 나오는 존 트라볼타는 치밀한 범죄 계획을 영화에 빗대 과시적으로 늘어놓으며 결국 자신이 성공할 거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듣던 경찰은 “당신이 말하는 영화는 해피엔드가 아니라서 흥행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하지요. 그런데 해커로 존 트래볼타에게 고용되었다가 마음을 바꾸고 그에게 대항하는 휴 잭맨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의 계획은 성공으로 끝납니다. 마지막으로 잭맨과 헤어질 때 트래볼타는 “모든 일이 네 뜻대로 끝나진 않아. 관객들은 해피엔드를 원하거든”이라는 말을 남깁니다. 트래볼타가 승리하는 결말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누구의 시점이냐에 따라 ‘해피엔드’와 ‘언해피엔드’는 순식간에 교차하는 게 아닐까요. 잡아먹는 뱀의 행복과 잡아먹히는 개구리의 불행처럼 말입니다.

볼테르와 마라는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시기에 서로 충돌하는 명언들을 남겼지요. 사상가 볼테르가 “나는 당신의 생각을 증오한다. 그러나 난 당신이 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끝까지 투쟁할 것이다”라고 한 반면, 혁명가 마라는 “자유의 적에게는 자유가 없다”고 했으니까요. 얼핏 볼테르의 사려 깊은 말보다는 마라의 강렬한 발언이 더 멋지게 들립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유의 적’을 맘대로 규정하는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을까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자체를 부정하는 극단적 상대주의자가 되자는 게 아닙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로부터 모든 방위(方位)가 결정된다는 확신이야말로 괴물을 만들어내는 에너지임을 상기시키고 싶을 뿐입니다. 곰과 인간 중 과연 누가 괴물입니까. 결국 ‘브라더 베어’에서 코다의 엄마인 곰과 키나이의 형인 인간은 각각 아들과 동생을 살리려 서로 싸우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에게 ‘괴물’이 되었을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