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도쿄에서 열린 미·일 안보조약 협상에 참석했던 존 포스터 덜레스는 일본에 대해 “앞으로 셔츠와 잠옷을 양대 수출품목으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칵테일 파티용 냅킨을 괜찮은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일본 경제의 잠재력과 기술력을 얕잡아 본 발언이었다.
물론 덜레스의 말대로 되지는 않았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것은 미국인이었다. 세계 최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선보인 것도 미국 기업인 리젠시 일렉트로닉스였다. 그러나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세계 시장을 제패한 것은 이름없는 중소기업이었던 일본의 소니였다.
소니는 처음부터 미국 기술을 베끼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기만의 독창적인 기술을 더하기 위해 시간과 돈,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 기업들이 무심코 넘겼던 트랜지스터 불량품의 원인을 밝혀내고, ‘터널 다이오드’라는 새로운 소자를 발명했다. 소니 연구원이었던 에사키 레오나는 그 업적으로 1973년 일본인으로는 세 번째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미국의 벨연구소가 발명한 ‘CCD(전하결합소자)’를 이용해 8밀리 캠코더를 개발한 것도 소니였다. 미국 기업들은 용도를 찾지 못해 CCD 연구를 모두 포기했지만 소니는 홀로 11년간의 연구개발 끝에 전혀 새로운 소비자 전자제품 시장을 창출해냈다.
소니만이 아니다. 산요의 실리콘 태양전지, 샤프의 시스템 액정, 야마하의 FM칩, 니치아 화학의 ‘청색 LED(발광 다이오드)’도 5~10년에 걸친 악전고투의 산물이다. 그렇게 해서 일본 기업들은 첨단 전자부품 산업에서 원천기술과 특허로 두꺼운 진입장벽을 쌓았다. 일본 제조업이 10년 장기불황을 버티고, 디지털 가전시대의 주역으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저력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해 대일(對日) 무역적자가 186억달러로 늘어나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우리만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대박을 터뜨린 카메라폰의 경우 부품 국산화율이 40%에 불과하다. 간신히 60%대까지 높였던 휴대폰 국산화 비율이 뚝 떨어진 것이다.
이미지 센서, 렌즈, 대용량 플래시메모리 등 핵심부품 대부분을 일본 기업들로부터 사와야 한다. 그래서 가격이 비싼 고급 제품을 많이 팔면 팔수록 국내 휴대폰 업체들의 이익은 오히려 줄어드는 기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핵심부품·소재·설비를 들여다 조립만 하는 ‘껍데기 장사’로는 기술종속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당장은 돈벌이가 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제 무덤을 파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단순 조립가공 사업은 이제부터 하나씩 중국에 넘겨줘야 할 처지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은 여전히 “기술은 필요할 때 사다 쓰면 되는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젖어 있다. 경기가 나빠지면 R&D투자부터 줄이고, 연구원들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내몰고 있다. 국내 연구개발 투자 상위 20대 기업의 투자금액(2002년 6조6256억원)을 합쳐봐야 포드(2001년 9조7260억원)나 GM(8조1490억원), 지멘스(7조8600억원) 한 회사보다 적다.
최근 일본 경제의 회생은 우리에게 국가경제와 기업 경쟁력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를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R&D를 통해 축적한 기술력이 바로 그것이다. ‘앞으로 한국경제는 무엇으로 먹고 살아야 하느냐’는 고민에 대한 해답은 여기서 찾아야 한다.
(김기천·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