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김점선

연구실 문을 여니 발밑에 하얀 사각봉투 한 장이 떨어져 있다. 봉투를 여니 붉은 태양이 꿈틀거리고 푸른 새 한 마리가 마악 그 태양 속으로 날아 들어가고 있는 그림 카드가 있다. 발신인을 확인하고 나의 눈에는 물기가 지나간다. 지난해 어떤 이유로 인해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고통을 받은 제자 K가 보낸 카드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고통 받는 것을 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새해에는 Love, Laugh, Live하시라!(사랑하고 웃고 살라)”는 아름다운 말.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건넸어야 하는데 어떻게 어린 네가 먼저 이런 말을 나에게 먼저 해주는 것인지…. 그 성숙함과 용기가 아름답다. 그런 순간의 ‘마음-무지개’에 매달려 우리는 이 무섭고도 기막힌 삶의 사막을 팍팍하게 걸어간다.

수첩을 정리하다가 지난 여름 잠시 귀국했던 친구의 명함을 발견한다. 그녀는 맨해튼,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57층 변호사 사무실에 취직이 된 국제 변호사다. 국내 사립 명문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교수 자리를 구할 수 없었고 또 10년 넘게 다녔던, 아주 괜찮은 직장에서 비전을 발견할 수도 없었던 그녀는 과감하게 박사 학위와 직장을 내던지고 법대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42세의 나이로 필라델피아로 떠났다. 그때 사람들은 다 그녀에게 미친 것이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친 것이 아니었고 단지 ‘무지개 저편’의 어느 곳을 꿈꾸었고 두 손으로 무지개를 잡을 뜨거운 용기와 실력이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무지개 저편을 꿈꾸면서 그곳에 도달하여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과 또 하나는 무지개 저편의 꿈의 나라를 무지개 이편으로 끌어와서 이 땅에다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 앞 경우의 사람을 낭만주의자라고 부른다면 뒤 경우의 사람을 액티비스트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내 친구는 낭만주의자인 것만은 아니다. 이상하게도 낭만주의와 현실주의가 기묘하게 결합된 그녀에게서 나는 낭만적이기 위해서는 더욱 더 냉철하게 현실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 것 같다.

새벽 버스를 타고 안개 속을 가는데 버스 안에 이런 노래가 흐른다. ‘무지개 넘어 어느 곳, 높이 가는 길/ 언젠가 한번 내가 자장가에서 들었던 곳/ 무지개 넘어 어느 곳, 하늘이 파랗고/ 힘들게 꿈꾸었던 꿈들이 진짜 이루어지는 곳/…/ 모든 고통들이 레몬 즙으로 녹아 흐르는 곳…’. 주디 갈란드, 혹은 타코의 목소리인지? 원래는 ‘오즈의 마법사’에 나왔던 아이들 노래였지만 지금은 재즈풍의 편곡으로 어른들이 더 좋아하는 노래가 된 ‘무지개 넘어 어느 곳’이란 노래다.

어린 시절 공원에서 놀다가 갑자기 내린 소나기 때문에 바위에서 미끄러져 턱 아래가 날카로운 바위 돌에 찢겨 줄줄 피를 흘리며 아버지 등에 업혀 병원으로 달려간 적이 있다. 그때 갑자기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우리의 앞으로 솟구치던 성대한 무지개. 아버지의 등에 업혀 바라보았던 그 숨 막히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한다. 지금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피 흘리는 나를 등에 업고 무지개를 향해 뛰어가던 그때의 그 젊은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나에게 영원히 그날의 아버지다. 그날 이후의 아버지는 무력하고 소시민적인 그저 그런, 보통의 한국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후 나는 ‘나의 무지개’를 만들어야 했고 아버지가 보여주던 무지개와 내가 만든 무지개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의 무지개가 딸의 무지개는 아닌 것이다. 어쨌건 그날의 나는 무지개를 바라보느라고 생살이 찢어져 피 흘리는 그 아픔을 잊어버렸던 것 같다. 인간들은 그렇게 무지개 때문에 고통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무지개 때문에 오히려 고통을 받기도 한다.

정말로 사랑하는데, 진실로 사랑하고 도와주고 싶은데도 상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때가 있다. 그런 일이 참으로 많았던 한 해였다. 다만 ‘무지개 넘어 어느 곳’을 꿈꾸며 그곳에서는 ‘하늘이 푸르고 파랑새가 날아다니며 고통들이 레몬 즙처럼 녹아 흘러내리기를’기원해 본다. 그리고 우리 모두 ‘사랑하고 웃고 잘 사는’ 새해가 되었으면!

(김승희 시인·소설가·서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