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인 한림대교수

이보다 더 썰렁할 순 없다. 지난 주말 엄동설한의 야밤에 대통령 선거 승리 1주년을 극소수 지지자들끼리 자축하는 모습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자리 어디에서도 대통령의 경축행사에 예상되는 권위와 품격은 찾기 어려웠다. 불꽃놀이나 연미복 파티 따위야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수선한 의전에다가 격앙된 감정이 여과 없이 돌출하고 원색적 화법이 서슴없이 난무했던 이른바 ‘리멤버 (Remember) 1219’ 행사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보게 된 느낌을 남기고 말았다. 그렇게 쫓기듯 거칠게 잔치를 치를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의 현재 처지가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측은한 마음은 잠시, 사실은 행사의 시말(始末)이 그보다 더 기막히게 의도적일 순 없었다. 구설수에 오를 것을 미리 각오하고 행사에 참석했다는 노무현 대통령은 그날 자신의 외부 일정을 이례적으로 사전 공개함으로써 노사모 등 핵심 지지세력을 일부러 소집한 셈이 됐다.

또한 대선 승리의 영광은커녕 1년 만에 거의 대부분이 엉망으로 변해버린 상황에서 노 대통령은 ‘공화국 수비대’와도 같은 친노(親盧) 단체를 앞세우며 또 한 번의 ‘벼랑끝 전술’을 연출했다. 국민적 지지도가 바닥을 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데다가 정권 출범 과정에 얽힌 ‘출생의 비밀’ 또한 하나하나 베일을 벗는 국면에서 노 대통령은 정면돌파를 작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날 밤 노 대통령은 국민의 재신임을 묻겠다고 했던 몇 달 전의 번민을 잊은 듯했다. 검찰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결과 여하에 따라 당장이라도 하야할 수 있다고 선언했던 몇 주 전의 약속 또한 쉽게 지키기 않을 성싶다. 대신 모든 잘못이 야당과 국회, 언론 등을 향해 ‘네 탓’으로 돌려졌다.

유례 드문 헌정 불안이 예감되는 시점에서 최소한의 자기 책임에 대한 자괴와 자성마저 건성의 인사치레에 가까웠다. 탄압하는 ‘그들’과 핍박받는 ‘우리’라는 식의 감성적 이분법이 환호와 욕설 속에 나부꼈던 그날 밤 여의도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은 외출 상태라기보다 실종 상황에 더 가까웠다.

열렬 지지자들의 품에 안긴 노 대통령은 대선 승리 기념 자축행사를 총선거에 대비한 출정식으로 몰아갔다. 특히 그는 작년 대선과 내년 총선을 ‘시민혁명’이라는 개념을 통해 한 묶음으로 만들었다. 일종의 ‘시민운동’ 방식으로 선거를 치렀던 그들의 지난 대선 전략도 이미 충분히 특이했지만, 내년 총선을 ‘시민혁명’ 방식으로 접근하겠다는 선언은 보다 충격적이 아닐 수 없다. ‘그들 대 우리’라고 하는 적대적 사고로 무장한 대통령이 혁명군(革命軍) 수장 자격으로 임하게 될 것만 같은 내년도 총선거는 따라서 일종의 ‘내전’(內戰)이 될 가능성이 한껏 높아졌다.

절차적 법치주의를 보호해야 할 직책상의 소명을 대통령이 솔선수범 태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 그것을 지키기 위한 나머지 국가 기관들의 시대적 책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따라서 우리 국민들은 ‘리멤버 1219’ 행사에서 보인 노 대통령의 행적이 불법 사전선거 운동인지 아닌지를 가리게 될 중앙선관위의 판단을 주목할 것이다. 대선 불법자금을 수사 중인 검찰의 정치적 중립 의지 또한 더욱 냉철히 주시하게 될 것이다. 한때 '국민이 대통령'이라 했던 노 대통령의 입에서 ‘지속적 시민혁명’이 촉구되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황당할 순 없다.

(전상인 한림대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