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4자를 엮은 사자성어(四字成語), 고사성어(古事成語)는 입학 시험이나 입사 시험의 단골 메뉴였다. 어부지리(漁父之利) 정도는 몰라도, 와신상담(臥薪嘗膽) 수준을 술술 써내리려면 상당한 공부가 필요했다. 정치가 급물살을 탈 때면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니 곡학아세(曲學阿世)니 하는 말이 난데없이 한자 공부를 시켰다. 그러다 보니 ‘삼종지도’ 하면 ‘도시락통’으로 이어지는 난센스 사자성어 끝말잇기 같은 오락도 나왔다.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로 ‘우왕좌왕’(右往左往)이 선정됐다. 곰곰이 그 넉 자를 들여다보니, 표의(表意) 문자의 특성이 오롯이 살아있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 갈피를 못 잡고 이쪽저쪽 헤매는 모습이 한 글자 한 글자에 겹친다. 그 뒤를 잇는 ‘올해의 사자성어’는 점입가경, 이전투구, 지리멸렬, 아수라장…. 어느 하나도 희망적이거나 교훈적인 것 없이 그저 암담하고 답답할 뿐이다.

▶일본에서는 ‘올해의 한자’로 딱 한 글자를 고른다. 올해는 ‘虎’(호)를 뽑았다. 호랑이를 마스코트로 하는 프로야구단 한신타이거스가 18년 만에 우승하며 종이호랑이에서 맹호로 변했듯, 일본도 불황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소망이 담긴 선택이라고 한다. 이라크 전쟁을 연상시키는 ‘戰’(싸움 전)이나 ‘亂’(어지러울 난)은 꽤 큰 점수차로 2, 3위에 머물렀다. 2002년의 한자가 납치됐던 일본인 귀환을 뜻하는 ‘歸’(돌아올 귀)였던 것에 비하면 올해의 한자에는 희망이 담긴 셈이다.

▶엊그제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내년도 경영 화두(話頭)가 ‘오리무중’ 네 글자라고 내쏘았다. 낯선 단어도 아니다. 바로 재작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뽑혔던 사자성어이니, 우리는 4년째 그렇게 안개 속을 헤매고 있다는 말이 된다. 20여년 전의 ‘안개정국’이 악몽으로 남아있는데.

▶지난 1년간 우리는 코드정치, 특검정국, 측근비리, 검찰소환, 출국금지, 청년실업, 카드대란 등 실로 대단한 사자성어의 울림 속에 살아왔다. 엊그제 엄동설한의 대선 승리 1주년 축하대회에서 대통령이 쏟아놓은 사자성어들도 만만찮다. 정치개혁, 불법자금, 반칙야합, 시민혁명…. 하지만 우리네 평범한 시민들 가슴속에 담긴 사자성어는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전원취업’ ‘경제성장’ ‘가족건강’ ‘민주발전’ ‘빈곤해소’ 이런 게 아닐까.

(박선이 논설위원 sunnyp@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