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한테는 어마어마한 성찬(盛饌)이었죠. ‘저 배역을 제대로 씹어 삼킬 수 있을까. 탈이라도 나면 어쩌나’ 싶어 조마조마했습니다.”
공형진은 올해로 연기경력 14년의 베테랑 배우지만 요즘 신경성 경련에 시달린다. 좀처럼 긴장하거나 주눅 들지 않는 그에게도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영화 ‘동해물과 백두산이’(31일 개봉)는 “도둑놈이 망보듯, 관객 반응을 살필 정도로”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10여년을 조연 전문 배우처럼 뛰던 공형진은 마침내 손에 넣은 ‘주연’이라는 단어를 자꾸만 옆으로 밀쳐놓는다.
“‘오케이! 이제 내가 주연이야’ 같은 생각은 해보질 않았어요. 제가 이야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촬영 분량이 늘었지만 여전히 조연배우라는 마음으로 연기했습니다. 영화를 책임질 내공이 안 되는 걸 아니까요.”
‘동해물과…’는 보트를 타고 술판을 벌이다가 파도에 휩쓸려 남한으로 떠내려온 북한군 장교 백두(정준호)와 병사 동해(공형진)가 낯선 땅에서 일으키는 소동을 따라가는 코미디. 이 영화는 결코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이 아니지만, 엄살이 많은 사고뭉치 동해 역 공형진의 능청맞고 유머 넘치는 연기만큼은 파괴력이 대단하다. “이런 개마고원에서 땅을 팔 놈들” 같은 순발력 넘치는 애드리브도 여전하다. 그는 “뻔뻔하고 허점이 많지만 밉지 않은 캐릭터”라며 “웃음을 억지로 쥐어짜지 않으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음란 비디오를 만들어 파는 양아치(파이란), 좀처럼 웃기지 못하는 개그맨(선물), 사기치는 게 부업인 관광가이드(남남북녀), 능청스러운 철가방(위대한 유산)…. 영화 속 공형진은 날탕이고 3류였다.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찬 그의 캐릭터들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아무리 짧게 나와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는 “나쁜 인물이라도 사람냄새를 풍기면 관객이 끌어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북군사의 좌충우돌 코미디
"악역도 인간적이면서 사랑받아… (최)민식형 연기 보면 난 사기꾼"
올해만큼 바빴던 해도 없다. ‘블루’ ‘남남북녀’ ‘별’ ‘위대한 유산’ 등 우정출연까지 합쳐 모두 6편의 영화에서 관객을 만났다. 조연 공형진의 연기에 감탄한 이들은 “실패작들도 공형진 때문에 그나마 재미있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팀플레이를 못했다는 점에서 자신한텐 욕이었다”고 답했다. 그는 겹치기 촬영 때문에 전력투구를 못한 ‘남남북녀’를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연변에서 촬영하면서 ‘거 빨리 텅일(통일)돼야 합니다’ 같은 북한말을 귀동냥해 이번 영화에 써먹을 수 있었던 게 ‘남남북녀’가 준 선물”이라고도 했다.
그는 2개의 좌우명을 붙들고 산다. ‘남 탓하지 말자’와 ‘인정하고 박수치자’. “100만번 시기하고 질투해서 남의 자리를 뺏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각자 운명이 따로 있다는 얘기다.
“‘쉬리’ 때 정확히 102일간 강제규필름에 출근하며 그렇게 갈망했는데 ‘캐스팅 안 됐다’는 통보를 받았었죠. 돌아서서 내 물건 챙겨 나오는데 뒤통수가 얼마나 뜨끈하던지. 그때 다짐했어요. ‘너희들 실수하는 거다. 반드시 날 다시 찾을 거다. 그때 제대로 보여주마!’ 독기 품고 이만큼 왔으니 전화위복이죠.”
공형진은 결국 4년 후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강 감독의 부름을 받고야 만다. 요즘 또 다른 주연작 ‘라이어’ 촬영을 준비 중인 공형진이 가장 사랑하는 캐릭터는 역시 ‘파이란’의 양아치 경수였다. 공형진은 “(최)민식이 형 연기를 보면서 ‘내가 지금까지 사기를 쳐왔구나’ 깨달았다”며 “집안에서는 아버지, 밖에서는 민식이 형한테 인정받고 싶다”고 말했다.
무명 시절 “단 1초도 ‘난 안 되려나 보다’고 절망한 적이 없다”는 이 배우. “집에서 똥 묻은 개처럼 빈둥거릴 때도 주눅 들지 않고 살았다”는 그는 이제 충무로에서 가장 바쁜 배우가 됐다. 주연으로 올라서며 그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지만 다짐은 그대로다.
“오케이! 견뎌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