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한국에서는 소설은 곧 이야기라는 관념이 지배적인 것 같다. 물론 이야기로서의 소설은 아주 오래된 것이며 아직도 유효한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무수한 이야기가 이야기되어져 오면서 이야기로서의 소설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보여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것은 세계적인 현상이며 소설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난관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관념 소설이, 또는 언어적 실험으로서의 소설이 몇몇 작가들에 의해 산발적으로 쓰이긴 했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경향으로서 자리를 잡고, 맥을 이어가지 못하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우리 문단은 서사 구조를 가진 이야기에, 치밀한 구성에, 감동을 주는 내용에 높은 평가를 내리며, 그런 것들이 빠진 소설은 뭔가가 빠진 소설로 치부하는 것 같다.
이러한 사정이 바뀌지 않는 한 사르트르의 ‘구토’와 베케트의 ‘몰로이’ 또는 누보 로망 작가들의 다양한 실험적 작품들과 같은 작품들이 이 땅에서 생산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소설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그것의 가장 근원적인 차원에서는 단어들의, 그리고 문장들의 조합이며, 바로 거기에 언어적인 실험과 관념적인 유희가 발생할 수 있는 여지와 요소가 있다. 그리고 고도의 언어적인 실험과 관념적인 유희는 이미 낡은 이야기에 비해 훨씬 더 재미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소설에 길을 열어주는 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영문·소설가)
※이달에는 고우영(만화가) 김동수(연극배우) 강효주(한국문화경제연구소장) 이예훈(광고 카피라이터) 정영문씨가 교대로 집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