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외롭다. 누군가의 딸(‘피아노 치는 대통령’)로 머물다 작가주의 영화의 한 톱니바퀴(‘장화, 홍련’)를 지나 ‘…ing’(28일 개봉)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주인공이 된 배우 임수정(24)은 “무섭고 외롭다”고 했다. ‘표나지 않게’ 고등학교를 마치고 집에 틀어박혀 그늘만 쌓아두고 살던 그에게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어준 건 영화였다. 그런데 그 영화가 다시 그를 외롭게 할 줄이야.
“ ‘피아노…’는 얼결에 찍은 영화고요, ‘장화, 홍련’에서는 큰 역을 맡아 힘들었지만 사실상 감독님이 주인공인 영화라 부담이 크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엔 임수정이라는 배우에 대해서 단호한 평가들이 내려지잖아요. 제가 책임져야 할 영화니까요.”
‘…ing’는 불치병을 앓고 친구도 없는 민아(임수정)가 아래층에 이사온 서글서글한 대학생 영재(김래원)와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 코미디와 공포를 거쳐 이번엔 멜로로 장르가 바뀌었지만 임수정은 여전히 10대 소녀 역할이다. 그는 “어느덧 20대 중반인데 아직도 절 숙녀보다 소녀로 봐주시는 것 같아 싫지 않다”고 했다.
임수정은 어둡고 건조하고 낯가림이 심했다. 3편의 출연작 중 자신을 가장 닮은 캐릭터는 ‘장화, 홍련’의 수미란다. 그런데 “수미는 연기하기도 가장 힘들었던 배역이에요”라는 고백이 이어졌다. 본심을 드러내는 데 서툴기는 현실에서나 영화에서나 한결같은 모양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임수정이 영화를 장악하기보다 영화가 임수정을 변화시킨다. ‘…ing’도 여러가지 새로운 경험을 안겼다. 극중 어머니로 등장하는 이미숙으로부터는 순간적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는 법, 긴장을 조이고 푸는 법 등을 배웠다고 한다.
“카메라 앞에서 편안함을 느낀 건 이 영화가 처음이에요. 민아가 씩씩하고 행복해 보이지 않으면 어쩌나, 마음 졸였는데 시사회 보고 좀 안심이 됐어요. 내 안에도 밝은 모습이 있었나봐요.”
임수정은 어릴 적부터 병치레가 잦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그 외로움이 지금의 무표정하고 착 가라앉은 얼굴을 빚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어찌 해서 잡지모델이 된 그는 스무 살이 넘어 영화를 한 편씩 지나올 때마다 뒤늦은 성장통을 앓는다. ‘장화, 홍련’이 정신의 분열이라면 ‘…ing’는 몸의 분열이다. 그는 “민아처럼 큰 장애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저런 아픔들을 안고 사는 것 같다”며 “연기는 현실에서 억눌렸던 감정들을 풀어놓는 일이라 힘들면서도 행복한 작업”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등지고 닫아두었던 민아의 마음이 사랑을 통해 조금씩 열리듯이, 임수정은 이 영화를 촬영하며 많이 웃었고 성격도 밝아졌다. 그는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지고 그 시간들을 즐길 줄 알게 됐다”며 “그래서 그런지 ‘날 지키는 건 날 닫아두는 게 아니라 열어두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최근엔 영화평론가협회가 주는 영평상 신인상을 받았다. “과대평가를 받은 것 같아 창피했다”는 그는 그러나 요즘 즐비한 ‘얼짱들’과는 다른 향기를 풍긴다. 앳된 얼굴에 깊은 표정. 그 모순에 대해 그는 “세상에 대해 무덤덤하고 몸 움직이는 걸 싫어하는 게으른 성격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이 영화는 임수정이 오디션 없이 출연한 첫번째 작품. 배역에 선택된 것이 아니라 그 배역을 선택했다는 얘기다. 선택의 첫번째 기준은 ‘그 배역이 얼마나 측은한가’이고 두번째는 ‘얼마나 연기력을 키울 만한 역인가’라고 했다.
“캐릭터가 저랑 닮아 있으면 연민이 생겨요. 그런 배역은 떨쳐버릴 수가 없죠. 그리고 욕심 없이 산 것 같은데 유독 연기에는 욕심이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