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 혼자 앉아 생각느니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우리 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이별 후에 일자서 없었으니 부모공양 글공부에 겨를 없어 그러한가.” 판소리를 잘 몰라도 ‘춘향가’에 나오는 이 쑥대머리 정도는 낯설지 않은 게 한국사람이다. 질펀한 애정 표현에서 수십만 대군의 적벽대전 스펙터클까지 오로지 북 장단 하나에 맞춰 소리꾼 혼자 펼쳐내는 1인 그랜드 오페라가 판소리다.
▶지난 8월, 세계적인 공연 축제인 영국 에딘버러 페스티벌 공식 부문에서 판소리가 비평가 상을 받았다. 판소리 ‘춘향가’를 영화화한 ‘춘향뎐’이 칸 영화제 본선에 진출한 뒤 두 번째로 세계 무대에 이름을 올린 셈이다. ‘춘향가’를 다섯시간 동안 완창한 안숙선 명창은 10분 넘게 기립 박수 갈채에 묻혔다. 부채 한 자루만 쥐면 세계 어디서나 공연할 수 있는 게 판소리니, 새로운 유목 시대라는 21세기에 가장 경쟁력 있는 예술이라고 해도 좋겠다.
▶지금 남아 있는 판소리 다섯마당을 완성한 것은 전북 고창의 오리(梧里) 신재효다. 하지만 판소리 사설과 발림을 갈고 닦아 문학성과 공연성을 발전시킨 것은 당대의 소리꾼들. 고종 때의 판소리 대명창인 송만갑이나 철종 때의 명창 박유전 같은 사람은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판소리의 특성을 달리하는 동편제, 서편제를 닦아냈다.
▶엊그제 판소리가 유네스코의 세계 무형문화유산 걸작으로 선정됐다. 남태평양의 섬나라 바누아투의 모래그림과 일본의 인형극 분라쿠(文樂), 캄보디아의 궁중무용, 멕시코의 죽은 자에게 바치는 축제 등 28개 중 하나다. 우리 전통 문화가 ‘세계적 목록’에 오른 게 자랑스러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온다. 이 목록은 ‘멸종위기 동물’ 목록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판소리 정기 공연은 국립극장의 월례 무대가 유일하다. 국립국악원의 ‘토요상설공연’이나 남원 민속국악원의 격주 ‘토요국악 무대’는 두 달에 한 번, 한 달에 한두 번, 달랑 한도막을 끼워넣는다. 20여년 전, 서울 원서동 공간사랑에서 금요일마다 열렸던 ‘뿌리깊은 나무’ 판소리 감상회가 새삼 떠오른다.
이 손바닥만한 무대가 농사꾼으로 초야에 묻힌 송만갑제의 수제자 강도근 명창을 불러올렸고 시골 잔치 무대를 전전하던 박유전제 한애순 명창을 다시 태어나게 했다. 으리으리한 국립국악원을 갖고도 30년 전 민간만도 못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우리 ‘무형문화 유산’ 정책이다.
(박선이논설위원 sunnyp@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