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半)식물인간’ 상태로 불치의 병에 시달리던 딸을 간호해오던 아버지가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인공호흡기를 떼내 딸을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 용산경찰서는 지난 12일 밤 9시40분쯤 용산구 후암동 자신의 집에서 가정용 인공호흡기의 전원코드를 콘센트에서 뽑아 이에 의존해 살아가던 자신의 딸(20)을 숨지게 한 전모(49)씨에 대해 18일 살인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전씨는 딸이 7년여 전 경추(목등뼈) 일부에 금이 가며 온몸에 마비가 오는 희귀병인 경추탈골증후군에 걸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빚을 감당하지 못한 데다 최근 병원측으로부터 “완치가 불가능하다”는 말을 듣고 절망한 끝에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전씨는 11일 밤 딸 치료비 등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을 한 부인 홍모(42)씨가 친정으로 가버리자 혼자 술을 마시다가 이튿날 밤 범행을 저질렀고, 30분쯤 뒤 스스로 119구조대에 신고했다. 딸은 심장박동이 멈춘 상태에서 인근 J병원 중환자실에 실려갔으며 16일 병원측으로부터 최종 사망 판정을 받았다.
전씨는 경찰에서 “딸의 병마 때문에 온 가족이 빚에 시달리며 불행을 겪어온 데다 병원비도 감당할 수 없고 조그만 희망도 찾아볼 수 없어 술기운을 빌려 범행을 저질렀다”며 “도저히 버틸 힘이 없었다. 하지만 딸년을 죽인 죄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전씨는 범행 후 부인에게 자신이 딸의 인공호흡기 전원을 껐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으며 부인은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다.
부인 홍씨는 “남편의 행동을 두고 처음에는 용서해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떠올리고는 그럴 수 없었다”고 말했다.
택시운전을 하다 3년여 전 그만둔 뒤 특별한 직업이 없었던 전씨는 딸 치료비로 그간 2억여원 정도를 쏟아부었다. 그 과정에서 6000만원 상당의 상계동 자택을 팔고 보증금 500만원·월세 60만원의 현 주거지로 이사한 데 이어, S병원측에 1500여만원·카드빚 2000여만원 등 5000여만원의 부채를 떠안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전씨 집안에서는 아들(24)만이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일하며 월급을 받아왔다.
전씨 딸은 몸을 움직이지는 못하지만, 입을 벙긋거려 의사소통할 수 있고 음식도 씹어먹을 수 있었던 상태로, 얼마 전 합병증으로 폐색전증(허파의 모세혈관이 막히는 증세)을 앓은 뒤부터 인공호흡기에 의존해왔다.
전씨 딸이 쓰던 인공호흡기는 2000여만원 상당으로 한 방송사의 ARS모금 프로그램에 사연이 소개된 뒤 시청자들로부터 기부받은 돈과 지난 8월 말 퇴원과 함께 S병원 의사들이 모아준 돈으로 구입한 것이라고 경찰은 말했다.
용산경찰서 관계자는 “당시 딸이 아버지 전씨에게 죽음에 동의한다는 뜻을 내비치지는 않았다”며 “전씨가 가족의 앞날을 위해서 어떻게 해볼 수 없었던 정황은 충분히 이해가 되나 사법적 처리는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한강의 최재천 변호사는 “안락사를 인정하는 외국의 경우도 환자 본인의 동의, 불치의 병, 안락의 목적 등을 요구하고 있는 데 비해 이번 사건은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며 “이번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의 안락사에 대한 논의가 재개되고 인식 수준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