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 17달러 임금의 궁핍함 속에서 카스트로 독재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고 있는 오스왈도 파야. “카스트로가 자신에 대한 비판자들을 억압하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혁명 50주년을 맞는 사회주의 쿠바. 수도 아바나의 한 노동자 주거지역. 분단된 한반도의 남쪽 체제와 오랜 시간 불화했던 한 지식인이 한국을 찾아온 뒤로 온 나라가 그의 과거행적에 대한 논란에 휩싸여 있는 동안, 나는 쿠바에서 카스트로 체제와 맞서고 있는 한 반체제파 지식인과 만나고 있었다. 오스왈도 파야(Oswaldo Paya·51). 쿠바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국민투표 실시를 요구하는 1만4384명의 서명서를 그가 의회에 제출한 다음날이었다.

오스왈도 파야와 송두율. 송 교수는 1995년 내가 출판사를 시작하면서 낸 첫 책 ‘역사는 끝났는가’의 저자였다. 그에게 책을 내자고 권유한 사람은 바로 나였고, 나는 어느 잡지에 그와의 인터뷰 기사를 길게 쓰기도 했었다. 그는 제1세계적 시각에 길들여진 남한 지성의 반성을 요구하며 사회주의체제를 선험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내재적으로 이해하라 권고한 적이 있다. 나는 지금 그 사회주의체제의 ‘내부’에 들어와 그 체제가 주는 나날의 고통을 견디며 분투하는 한 지식인과 마주앉아 있다.

쿠바에서 오스왈도 파야를 만난다는 것은 위험한 일에 속한다. 더구나 여행객의 신분으로 그를 만난다는 것은 추방의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다. 다른 일정을 취소당하더라도 그를 만날 것인가를 고민하다 쿠바를 떠나기 전날 그와 통화한 뒤 그의 집을 찾아갔다. 아바나 시내의 한 노동자 주거지역에 있는 빠야의 집에 다다랐을 때, 그는 골목에서 이웃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집은 깨끗이 정돈되어 있었지만, 낡고 좁았다. 자신의 집을 찾은 이방인인 내게 그가 한 첫 인사는 “나의 집이 당신의 집이다”라는 말이었다.

―지리적으로 멀고 쉽지 않은 길을 찾아와 주어 감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상황을 생각할 때, 한국인이 쿠바의 사회투쟁가인 나를 찾아와 주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남한의 젊은이들은 북한의 체제를 잘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쿠바의 우리가 어쩌면 더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북한이 억압과 노예상태에 놓여져 있다고 생각한다. 화해하고 대화하는 권리들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고 본다. 어떤 의미에선 여기 쿠바보다 북한이 더 심각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혹시 내가 실수하는 것이 있다면 지적해 달라. 내가 자세히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해준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당신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다. 당신을 쿠바의 현 체제와 맞서게 한 계기는 무엇인가?

“7형제의 소박한 가정이었다. 바티스타 군사쿠데타 열흘 전에 나는 태어났고, 바티스타 독재가 물러간 뒤 새로운 카스트로 채재 하에서 기독교인인 우리 가족들은 오랫동안 끊임없이 추적당하고 감시당하는 삶을 살아왔다. 우리들의 원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카스트로 체제에 무조건적으로 협력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중학생이었던 16살 때 기독교 청년들의 리더라는 이유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는 이유로 피노스 섬으로 유배당하기도 했었다. 당시 체코사태(소련의 탱크에 의해 프라하의 봄이 짓밟힌) 때 쿠바가 소련에 대한 지지를 밝힌 것을 보면서 나는 이 체제가 소련에 대한 맹목적 추종의 체제라는 회의를 가졌다. 이것이 나를 처음으로 정치적 행동으로 이끈 동기였다고 기억한다.”

―쿠바의 현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말해 달라.

“카스트로의 혁명은 처음 민중의 지지를 받았지만, 이후 그는 쿠바에 완전한 불관용의 체제를 만들어 놓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과거의 불의를 뛰어넘는 전체주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은 특권화되었고, 특권화의 정점에 그는 완고한 사적(私的) 권력을 구축했다. 바티스타 독재체제의 악법과 모순을 뜯어고친다고 했지만, 그가 만든 쿠바의 사회주의 신헌법은 그 자신이 법으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카스트로는 자신의 절대권력에 반대하는 비판적인 사람들을 ‘벌레들’이라 불렀고, 종교적인 어떤 이유로 처벌하거나 처형했고, 심지어 혁명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 경우에라도 반대파라는 이유로, 라이벌이라는 이유로 제거했다. 말하자면 이 체제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벌레들’ ‘적들’로 간주했던 것이다. 혁명 직후 처음에는 바티스타 정권의 협력자들을 처벌했지만 이후론 정치적 반대파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조작된 사건들에 1000명이 연루됐고, 6만 명의 정치범,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주로 청년들)이 강제노동을 당했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선 쿠바를 민주국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라틴 아메리카에선 그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체제는 단순한 정치적 독재체제가 아니라 완전한 전체주의 체제이다.”

―쿠바의 현실이 매우 어렵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카스트로는 그것이 쿠바혁명이 외국의 지배에 맞서 온 결과라며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는가?

“당신은 가난의 평등을 목격한 것이 아닌가. 오랜 가난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여야 한다는 이유로 개인적인 경제활동은 철저히 금지되어 왔다. 심지어 길거리에서 관광객들에게 꽃을 파는 것도 단속하면서 말이다. 관광객들이 뿌리는 달러에 국가수입의 가장 많은 부분을 의존하면서도 말이다. 쿠바 혁명의 반(反)제국주의를 말하지만, 알다시피 쿠바는 소련을 일관되게 지지해 왔고 충성을 다해 왔다. 체코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유일하게 소련을 지지한 것이 쿠바이다. 세상에 ‘좋은 제국주의’라는 것이 어디 있는가.”

―좌익 독재는 우익 독재보다 신사적인 것, 불가피한 것이라는 말들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남쪽 독재체제의 경험이 있다면 당신은 두려움의 문화가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독재체제에는 좌·우가 없다. 개인의 권리를 힘이나 명분으로 억누르는 것을 독재체제라고 한다면, 나의 요구는 누군가에 대한 증오와 두려움을 조장하는 이 체제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1991년 내가 지금보다 더 좁은 집에서 살 때, 나는 쿠바인들 스스로 민주주의를 찾기 위해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해 집을 개방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집을 찾아왔는데, 쿠바 공산당에서 민간인 복장의 요원들을 보냈다. 그들은 집을 부수고, 서명용지를 훔쳐가고, 거기에다 ‘CIA 첩자’ ‘벌레’라고 적어 나를 모욕하고, ‘피델 카스트로 만세’라고 적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임신한 나의 아내는 친정에 가서 살아야 했는데 이런 상황이 1999년까지 계속됐다. 피델은 경찰들을 내세워 이런 짓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억압 이전에 그는 대중의 분노를 선동한 것이다. 그는 권력을 동원한 민중 캠페인을 통해 ‘자, 국민들이 쿠바혁명의 반대파들을 반대하지 않는가’라며 거짓말과 테러리즘을 선동했다.”

파야의 반체제운동을 상징하는 조형물. 바렐라 프로젝트에 영감을 얻은 한 조각가가 2000년 만든 것으로, ‘억압 속에서 움트는 씨앗’을 형상화하고 있다.

―당신이 벌이는 사회투쟁의 기반은 무엇인가?

“1988년 나는 처음으로 ‘기독교해방운동(MCL)’을 창설했는데, 이 운동은 종교적 운동이 아니라 시민운동이었다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이 운동은 비폭력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쿠바인들의 화해와 자기 문제에 대한 조정을 권리를 찾으려는 운동이며, 외부적 개입이나 외부적 행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쿠바 내부로부터의 운동에 의해 시민적 권리를 찾으려는 운동이다. 변화는 외국으로부터가 아니라 쿠바 내부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나는 이 일을 15년 동안 해 왔다.”

―당신이 창설한 단체의 명칭도 그렇지만, 당신에게서 기독교의 분위기가 강하게 느껴진다. 신앙은 당신에게 무엇인가?

“나는 나의 이 싸움이 물리적 권력과 영혼의 싸움이라고 생각한다. 신앙은 운동적 차원 이전에 개인적 차원에서 소중한 것이었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들 각자는 한 정당에 굴복하고 한 사람에게 복종해서는 안 되며, 어떠한 경우에라도 한 개인의 권리가 이념이나 체제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사회적 연대의 기초이다. 개인적 권리를 억압당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 고통을 견뎌 왔다. 정치가 권력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존경과 사랑, 연대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믿음은 분명 나의 신앙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나의 모든 가족들이 공격당하고, 잡혀가 취조당하고,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누구도 나의 집을 찾아오지 않았을 때조차도 신앙은 나에게 위안을 주는 원천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면 주기적으로 두 대의 차량이 나를 미행하고, 회사와 식당, 교회에서도 언제나 감시의 눈이 나를 따라다니는 현실 속에서 나는 거리의 정치범이며 거리의 수용소에 갇힌 수인이었다. 한 번은 집안 일을 하는 미장이에게 정부요원은 프락치를 강요했다. 미장이가 거부하자 가족들을 추적하고 죽이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나의 아이가 입원했을 때도 요원들이 찾아와 의사에게 상황을 체크해 갔으며, 여기 도착하는 편지나 전화는 다 감시·도청당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고립무원의 섬에서 모든 것을 가진 거대한 권력과 한 개인과 가족이 맞서는 상황을. 나는 당신 역시 억압 속에서 깊은 정신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을 살아왔으리라 생각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신앙은 나를 버티게 하는 힘 그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추진하고 있고, 이제는 세계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바렐라 프로젝트’에 대해 말해 달라.

“내가 추진하는 바렐라 프로젝트는 19세기 쿠바의 독립과 기독교 인간주의를 주창하다가 (페르난도 7세에 의해) 쫓겨나 망명했던 카톨릭 성직자 펠릭스 바렐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프로젝트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언론과 표현 결사의 자유, 정치범 석방, 선거법 개혁, 자유기업의 허용과 파업의 자유 등이다. 현재 쿠바에서는 외국인은 회사를 가질 수 있어도 쿠바인은 가질 수 없다. 만일 내가 돈이 있어도 당신이 묵고 있는 호텔 같은 데서 잠을 잘 수가 없다. 지금 쿠바의 선거제도는 카스트로 혼자서 독주하는 경주와도 같다. 나는 이 현실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쿠바의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쿠바의 변화의 기초가 되는 기초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안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자유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쿠바 헌법에 의하면 1만 명 이상이 어떤 법안에 서명하여 의회에 제출하면 그것을 토론하도록 되어 있다. 나는 작년(2002년) 1만1200명의 서명을 모아 의회에 제출한 바 있지만, 1당 체제의 개혁과 쿠바의 민주화를 앞당기기 위한 이 요구는 권력에 의해 공개되지 않고 있다. 나는 바로 어제(3일) 1만4384명의 서명을 다시 제출했으며 이 서명은 작년에 서명한 사람을 제외한 숫자이다. 이것은 쿠바 사회주의 40년 역사에서 최대의 자생적 비폭력 정치개혁운동이라 할 수 있다.”

―테이블 위의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저 조각은 산티아고 데 쿠바 출신의 조각가가 2000년 말 바렐라 프로젝트에 영감을 받아서 보내온 것이다. 한 번도 만난 적 없고 알지 못하던 조각가의 마음으로부터의 동의가 바로 바렐라 프로젝트의 기반이다. 저것은 억압 속에서 움트는 씨앗을 형상화하고 있다. 카스트로 권력은 하나의 선택에 대한 제안에 대해 75명의 구속으로 답했다. 이 운동의 주창자인 나를 구속하지 않은 것은 외부세계에 쿠바체제가 마치 유연한 것으로, 다른 한편으론 파야가 별 것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카스트로의 얄팍한 계산이라 본다. 그러나 저 조각이 형상적으로 말하듯, 이 운동은 억압을 상정하고 시작된 운동으로 누구도 우리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이 때 마침 한 구속자의 어머니가 빠야의 집을 찾아왔다. 그녀는 우리를 보더니 “남한에서 왔는가, 북한에서 왔는가”를 물었다. 빠야가 대신 이렇게 답했다. “북한에서 나를 찾아왔겠느냐?”)

―스페인 잡지 ‘엘 파이스’의 기자는 당신이 한 번도 감옥에 갇힌 적이 없었다고 썼다. 맞는가?

“체포된 적은 많다. 그때마다 석방되었을 뿐이다. 무수히 안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고, 먹방에 갇힌 적도 있다. 한 번은 감옥 입구에서 그들은 잡범들에게 나를 가리켜 5살 소녀를 강간한 사람이라고 거짓말로 소개를 했다. 이 말은 그동안 반대파를 부르던 ‘벌레’라는 말보다 더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그것은 나를 죽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나의 어머니가 2년 전 암으로 돌아가셨는데 망명 중인 나의 형제들이 방문하려 했지만 그들은 거절당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회의가 한국에서 열렸을 때(2002년)는 한국을 방문하려 했지만 기관의 방해로 참가하지 못했다. 나와 일하는 활동가를 협박하고, 서명용지를 빼앗고, 직장에서 쫓겨나면서 까지도 우리는 1만1030명의 서명을 받았다. 정부는 우리가 서명을 제출하면서부터 공격적인 캠페인을 하기 시작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쫓아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권력은 당황한 것으로 보인다.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자신의 이름과 신원을 공개하고 하면서 우리는 두렵지 않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 체제의 근본적 바탕인 공포와 두려움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공포와 두려움을 기반으로 한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시민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정부는 서명에 참가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활동가를 참칭하면서 파야가 나를 보냈다, 돈을 주겠다, 이렇게 매수하고 회유하면서 파야는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공작은 이 권력이 강한 것 같지만 실은 취약함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는 카스트로 권력에게 우리의 바렐라 계획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 계획이 그들의 말대로 종속적 계획인지 긍정적인 계획인지 쿠바인들이 알 수 있도록 알리라고 요청하고 있다.”

―반체제파의 일부는 당신을 체제를 정당화한다고 비난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신의 이념을 물어봐도 되겠는가. 알려져 있듯이 당신은 사회민주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가?

“지금의 카스트로 1인 체제, 쿠바식 사회주의체제의 극복을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야생의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는 아닌 정의와 연대가 넘치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다. 어떤 모델이나 어떤 체제도 개인과 인간 공동체 위에 군림할 수 없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적 실천이 특정 이념이나 명분 위에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우린 이미 쿠바 혁명의 독재체제와 전체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대화, 전국적인(민족적인) 대화 위에서 민주주의로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시장도 권력도 인간의 존엄성 위에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쿠바는 현재 정부와 군사와 자원을 독점한 과두제 체제 아래 놓여 있다. 소련이 그러했듯이, 이들도 언젠가는, 미래에는 자본주의자들이 될 것이고 쿠바 사회는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쿠바 내에 사는 사람들이나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쿠바인들에게 요청하고 싶은 것은 민주주의와 시장으로의 이행을 복수나 편견 없이 이루어내되, 무상교육과 의료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소외와 빈곤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가자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 라틴 아메리카와의 관계에서는 독립을 유지하되 우정이 가능한 관계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국가 프로젝트는 사회적 보장에 바탕을 두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동유럽과 같은 극단적인 변동을 경험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치적 해방, 사회적 권리, 경제적 자유를 얻는 것을 지지하지만 그렇다고 빈부격차가 심한 극단적 자본주의로 빠져드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지금까지 두 가지 신화가 있어 왔는데, 그 중 하나는 공산주의가 사회정의를 가져올 것이라는 신화였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특권적 과두체제를 낳았다. 다른 하나 신자유주의가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신화 역시 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쿠바 민중은 자신의 역사 속에서 극단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다 겪었다. 쿠바 민중은 극단에 빠지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만한 경험을 쌓아왔다고 생각한다.”

―국제적 현안과 관련하여 이라크전에 대한 당신의 입장을 듣고 싶다.

“전쟁반대라는 수사적 표현과 명분은 얼마나 쉬운 것인가. 그러나 현실에서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전쟁은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러나 동시에 불의한 체제와 범죄적 체제 역시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중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일관되게 평화를 주장했고, 범죄적 체제의 희생자들을 구하는 수단이 전쟁 뿐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지금은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전쟁은 이미 현실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정학적인 이해관계 혹은 이념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이라크 민중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존재이지 석유유전이 아니다. 테러와의 대결에 의한 희생자들이다. 나는 그들이 그들의 의지와 지혜로 지금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있어서도 쿠바와 미국의 관계설정문제는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다. 미국과 쿠바 양쪽 정부에 대하여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겠다. 지금 쿠바의 국가 재정에서 수입 중 가장 큰 것부터의 순서가 관광수입, 해외송금, 설탕 순이다. 미국과 쿠바가 외면적으로는 적대적인 관계로 서로 악선전을 일삼지만 쿠바 수입의 두 번째를 차지하는 해외송금의 상담부분은 매년 10억 달러가 넘는 미국으로부터의 송금이다. 쿠바가 미국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 하는 것이다. 미국은 지금까지 쿠바에 대한 경제봉쇄를 해오고 있는데 이것 역시 쿠바문제의 정당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본다. 미국은 쿠바에 있는 ‘특수이익대표부’를 통해 특이하게도 매년 2만 명에게 비자를 주면서 건당 600달러를 쿠바정부에 준다. 경제봉쇄라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비공식적 관계가 쿠바인들에게 주는 실질적인 이익은 무엇인가. 투자자와 관광객이 와도 이들 대부분 경우에 쿠바인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수입되는 자동차들도 정부 관계자나 당 간부들은 탈 수 있지만 쿠바인들은 탈 엄두를 내지 못한다. 미국은 경제봉쇄로 쿠바의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듯 한데 현실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 콜린 파월을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미국식으로 쿠바의 변화를 추구하지 말라고 했다. 쿠바 변화의 주체는 쿠바 민중들이고 국가와 국가, 정권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쿠바 민중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했다.”

―당신이 자전거를 타고 직장에 출근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본 적이 있다. 당신은 망명하지 않고 20년 동안 쿠바의 한 국영회사에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신의 임금은 얼마인가? 그것으로 생계를 꾸려 가는 것은 가능한가?

“나는 물리학과 공학을 공부했고, 현재 병원의 전자의료기구 기술자이다. 1984년부터 다닌 직장에서 한 달에 415 페소(미화 17달러)를 받는 것이 나의 임금수입의 전부이다. 나의 가족도 일부 직장에서 쫓겨났지만 나 역시 줄곧 통제 아래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처음 사람들은 나에게 인사를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정부가 주는 배급표를 바꾸면 5파운드의 쌀과 2.5파운드의 설탕을 살 수 있다. 기본적인 식품은 값이 싸다고 하지만 1파운드의 돼지고기가 200페소이고 같은 양의 달걀이 20페소라고 한다면 최저의 식생활조차 만만한 것은 아니다. 외부의 도움이 없이 나의 임금수입만으로 생활을 꾸려 가는 것은 어렵다.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와 미국에 있는 형제들이 주는 도움에 일정부분 의지하기도 한다.”

―당신은 자신이 하는 운동의 미래를 확신하는가.

“1997년 처음 이 계획을 제안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 계획 역시 다른 반대파의 운명처럼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2만 명 이상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고 이 움직임은 점점 커져갈 것이다. 피델이 날 협박하고 감옥에 넣으려 해도 우리는 바렐라 계획을 추진하면서 전국적인 대화를 추구할 것이고, 그 대화의 자리에 정부를 초청하겠지만 그들의 응답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추진할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단계에 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나에게 준 인권상이 그것을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쿠바 내부에서 점점 커져 가는 새로운 정신과 영혼에 의해서, 그리고 온 세계에서 커져 가는 민주주의를 위한 연대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시민적 권리, 빈민을 위한 정의를 위해 계속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다. 비록 민주적 변화의 과정에서 내가 또다시 반대파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변화가 필요한 사안에 대해 적절한 대답을 찾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린다. 끝으로 한국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는가?

“나는 한국인들에게 감탄하는데 그것은 경제발전만이 아니라 시민저항을 통해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것이다. 한국인(남한)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여주었다. 북한의 억압과 노예상태에 있는 민중들 역시 거기에서 벗어나서 남북의 민중들이 조응할 수 있는 길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의 집을 나와서 누추한 집들이 늘어선 골목을 걸었다. 골목에는 찌는 더위에 웃옷을 벗어 젖힌 아이들이 놀고 있고, 대낮부터 술에 취한 남자 몇은 자신들이 마시던 술을 권한다. 방금 내가 만난 사람은 카스트로와 쿠바 공산당이 선전하듯 혁명을 파괴하기 위해 미국이 만들어낸 제국의 정보요원이고 쿠바의 적들이 이용하는 도구에 불과한 인물인가. 쿠바의 가난은 강대국 미국의 오래고 철저한 경제봉쇄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지만, 사탕수수의 흉작도 미 제국주의의 음모라는 식의 쿠바 공산당의 선전은 공허하고 지겨운 것이다.
파야는 매일같이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지나 출근을 하고, 돌아와 자신을 찾는 '체제가 버린 자들'을 위로하며 일상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힘은 화려한 수사나 이념적 논리가 아니라 바로 '17달러의 삶'에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체제비판의 도덕성(moral)과 관련된 문제이다. 다시 송두율을 생각한다. 북한 권력이 부여했고, 그가 의식-무의식적으로 동의한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 김철수'는 현실과의 대면에 실패한 그의 관념과 추상을 검토하는 거울이 되어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오류가 아니라 오류를 대면하는 진정성의 문제이다. 나는 내가 아는 진지한 송두율이 그 자신이 비판해 온 무책임한 '좌파적 너절함'에 갇히지 않기를 바랬다.
불 꺼진 아바나의 어두운 저녁 풍경. 송두율이 어느 글에선가 말한 '남미 민중의 유토피아적 표징'을 나는 지금 보고 있는가, 아니면 이념의 실험이 좌절돼 가는 '슬픈 적도(赤島)'를 보는 것인가. 저녁이면 말레콜 해변 긴 방파제를 서성이며 몇 푼의 달러를 얻기 위해 관광객들에게 손짓하는 어린 소녀들. "쿠바에서 지금 변화를 이뤄내는 유일한 반(反)체제는 달러"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 정녕 슬프지 않은가. 아바나의 잠 못 드는 밤에 쓴다.

(글·사진=문부식·‘당대비평’ 편집위원)

▲ 오스왈도 파야는?

1952년 2월 29일생인 오스왈도 파야는 ‘기독교해방운동(MCL)’을 창설해 카스트로 체제에 저항하고 있는 쿠바의 대표적인 반(反)체제 인사다.

그가 주도하는 ‘바렐라 프로젝트’는 쿠바의 시민적 권리에 대한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의 실시를 요구하는 서명운동. 이 운동으로 그는 2002년 사하로프 인권상을 수상했고, 바츨라프 하벨 체코 대통령과 니카라과 정부에 의해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분열돼 있는 쿠바의 반(反)카스트로 진영을 결합할 수 있는 인사로 인식되고 있다. 이번 인터뷰는 한국 언론으로선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