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이마, 깊고 총명한 눈동자. 쟁쟁한 연기자 20명이 앉은 긴 테이블 끝에 작가 김수현(金秀賢·61)이 앉아 있었다. 다음달 4일 시작하는 SBS 새 주말드라마 ‘완전한 사랑’ 연습장이다. 토요일 오전 8시에 모여 4시간 넘게 170쪽 분량 대본 2권을 읽는 동안, 젊은 연기자들이 간간이 일어나 물을 마셔도 이 대가(大家)는 팽팽하게 긴장한 채 꿈쩍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밥집 맏딸로 부잣집 막내아들(차인표)과 결혼해 시댁에서 괄시받으며 두 아이를 낳아 기른 ‘영애(김희애)’다. 남편 출근시킨 뒤 혼자 병원에 갔다 불치병 진단을 받은 그녀가 사정을 모르는 시누이로부터 “이제라도 이 집에서 나가라”는 막말을 듣고 난생처음 목멘 고함을 지르는 대목이었다.
“죽어서 시체로 들려나가기 전엔 나 절대 이 집 안나가. 그렇다고 빨리 죽기 바라지 마. 오래오래 살 거야. 100살 꽉 채우고도 더 살 수 있으면 더 살 거야.”
딱 네 문장에 10년 쌓인 설움과 젊어서 죽는 막막함이 한꺼번에 북받쳤다. 듣는 이의 코가 시큰했는데, 주의 깊게 듣던 김수현은 “마지막 줄 끊지 말고 이어서 읽어. 거기서 넌 좀더 북받쳐도 돼” 했다. 영애의 감정에 빠졌던 김희애가 퍼뜩 배우로 돌아와 대본 빈칸에 부지런히 메모했다. 그러고 보니 볼펜 한 자루씩 안 쥔 배우가 없다.
“쉼표 하나 틀려도 난리를 친다”던 유명한 아집(我執)이 직접 보니 이랬다. ‘시청률 78%’(사랑과 진실·84년)라는 신화의 절반은 여기에 힘입었을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어디 있을까. 사석(私席)에서 마주 앉은 김수현은 양파가 매운 껍질을 벗듯 꼭 한 겹씩 속살을 드러냈다.
◆30년 넘게 썼는데, 힘들 때 없었습니까.
“난 편하게 써요. 내 속에 흘러넘치는 이야기를 죽 써내려 갔을 뿐이에요. 쥐어짜서 썼다면 힘들어서 진작 그만뒀지요. 모든 등장인물이 다 내 안에 있었어요. 비겁하고 비굴한 인물도. 글 쓰다 내가 먼저 울 때가 있어요. 내가 울지 않고 어떻게 남을 울리겠어요. 속필(速筆)이에요. 파지(破紙) 안 내요. 젊어선 저녁 먹고 책상에 앉아 이튿날 새벽 5시까지 25분짜리 일일극 5회분을 1시간에 원고지 25장씩 써내려갔어요. 그런데 이런 소리 하면 남들이 싫어할 거야. ‘남은 죽을 둥 살 둥 쓰는데 혼자 잘났어’ 하고. 어떤 네티즌이 나를 ‘늙은 여우’라고 부릅디다. 사오정·오륙도라는데, 저 할망구는 왜 만날 나오나 싶은가 봐.”
◆화가 나나요?
"(빙긋 웃고)화는 무슨. 그러나 이 나이 먹도록 열심히 살았는데 그런 소릴 들으면 욕스럽지요. 난 세상이 내게 '그만 좀 쓰라'고 하기 전에, 내가 먼저 '이만 안녕'하고 관둘 거예요. '내가 이젠 형편없구나' 싶을 때. 그런데 이번 추석 때 내가 쓴 단막극 '혼수'를 보니 '아직 안 늙었구나, 기운 좋구나' 싶어요."
KBS 2TV '혼수'는 추석연휴 동안 지상파·케이블·위성을 통틀어 시청률 1위였다. 김수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난 요즘 단골 가겟방에 들어갈 때 '여기 늙은 여우 왔다' 해요. 100살까지 꽉 채우고도 더 쓸 수 있으면 써야지."
◆새 작품 할 때마다 이승연·이태란·홍석천 등 구설수에 올랐던 배우를 하나씩 쓰는 건 사회에 도전하는 건가요.
“도전이라고 쓰지 말아요. ‘도전’은 그 행위로 내가 개인적으로 뭔가 얻고 싶을 때 쓰는 말이에요. 난 그저 불공평한 게 싫어요. 일테면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 누구를 막 매도하는 거. 남처럼 잘 풀리지 못하고 고전하는 사람에게 내가 힘이 되면 좋지요.”
◆‘김수현 사단’이라는 말, 싫어합니까?
"내 드라마에 누가 두 번만 나오면 사단이라고 해요. 난 그저 전심전력을 다하는 배우가 좋아요. 누가 나랑 친하다고 배역 주지 않았어요."
그와 절친한 탤런트 윤여정이 '사랑이 뭐길래'(91년)를 찍다 쓰러진 적이 있다. 김수현은 윤여정이 1쪽부터 132쪽까지 내리 나오는 대본을 내보냈다. 윤여정이 "잔인하다"고 하자, 김수현은 "난 비굴하고 응석 많고 바보 같은 인간이 제일 싫은데 너 지금 3가지 다 하고 있어!"하고 호되게 나무랐다.
참고로, 윤여정은 이번 드라마에 안 나온다. 김수현의 출세작 '새엄마'(72년)에 시어머니로 나왔던 정혜선이 김희애의 엄마를 한다. 김수현은 "같이 늙은 배우들은 편안하죠" 했다.
김수현은 일찍 세상을 떠난 절친한 배우의 유족을 챙기고 있다. 그 사연을 쓰고 싶었다.
"뭘 좀 들은 게 있어도 절대 쓰지 말아요. 혹 내가 누굴 도왔다 해도 그건 도움받는 쪽에서 말할 일이지, 도와준 당사자가 떠들면 그쪽에 폐가 돼요."
◆요즘도 밤에 씁니까.
“이젠 밤샘은 안 해요. 몸이 너무 축나. 낮에 쓴 지 한 10년 됐어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 빼고 내리 써요. 참, 쑥담배 피워요. 니코틴이 없다기에.”
◆드라마 안 쓸 땐 어떻게 삽니까.
"남들처럼 살아요. 1주일에 한두 번 골프 치고, 화초 가꾸고, 오전 3시까지 퀼트 만들고…. 넋 놓고 멍하니 노는 건 못해요. 책도 좀 읽지요."
평생의 콤비 곽영범(郭泳範·58) PD가 "좀이 아니라 무지막지하게 읽지. 물리학·의학·철학·심리학…. 퀼트도 얼마나 꼼꼼하게 뜨는지 바늘땀이 재봉틀보다 촘촘해" 했다.
◆감정이 매우 예민할 것 같은데요.
“예민하지요. 어려서부터 좀 달랐어요. 약간 되바라지고. 다섯 살 때 우리 동네 방앗간집 딸과 다투다 그 집 어머니에게 혼났어요. 내가 ‘당신 딸이 먼저 잘못했어요’ 하니까, 그분이 깜짝 놀라 우리 어머니에게 ‘얘가 날보고 당신이래’ 하고 깔깔 웃었죠. 자라선 혼자 하늘의 별 보고 구름 보며 멍하니 있곤 했어요.”
‘사랑과 야망’(87년)에 서울대 법대에 다니는 방앗간집 아들(故 남성훈)이 가난에 절망해 찬 눈으로 얼굴을 비비는 장면이 있다. 자전적 장면이 아닐까 했다. 그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나 마냥 평탄치만은 않은 청춘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난 다 잊어버린 장면이야” 하고 재미있어했다.
◆슬픈 일이 많았나요.
한순간 그의 눈이 좀더 깊어지는 것 같았다.
"난 일찍 인생에 통달했어요. 사랑·회한·연민·비겁·비굴…. 언제였더라. 서른넷이었어요. 그때 천진난만을 버렸죠. 특별한 계기? 없어요. 졸업한 느낌으로 평생 살았어요. 사람과 사람이 부딪쳐 순간순간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다 알지요. 아니까 드라마로는 쓸 수 있어요. 그러나 스스로는 큰 재미가 없었어요. 사람을 만나도 흥분·기대·호기심, 이런 게 없었어요. 사람이라는 것의 한계를 깨우쳤달까. 사람이니 관계니 아무것도 아니구나, 내가 그렇게 열심히 마음을 기울일 것 없구나,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면 된다, 했어요."
◆세상엔 차가운 사람으로 알려졌는데요.
"'세상이 나를 어떻게 봐주면 좋겠다' 하는 머리, 난 안쓰기로 한 것뿐이에요. 앞으로도 안써요. 내가 착해서 내게 일을 주나요? 내가 착해서 내 드라마를 보나요? 일 잘하고 서글서글하면 좋지요. 그러나 난 내 드라마 외의 다른 무엇으로 평가받고 싶지 않아요."
김수현은 "인생에서 자존심을 빼면 도대체 뭐가 남아요?" 했다.
“난 자존심 하나로 버텼어요. 내 자존심은 ‘난 잘났어’ 하고 뻐기는 게 아니라 비겁·비굴·치사·유치, 이런 게 내 몸에 범접하지 못하게, 한마디로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꽤 괜찮은 인간으로 살다 가는 거예요.”
그는 "인터뷰라곤 쓰지 말아요, 다른 신문이 골내" 하며 일어섰다.
사족(蛇足)이지만 김수현은 연습 중에 차인표를 "시우(극중 이름)야" 하고 부르다, 헤어지며 인사할 때 비로소 "인표야" 했다. 정말 차인표가 '시우'로 보이는 것 같았다. 그 몰입이 섬뜩하도록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