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의 시대는 사라졌다. 누구나 직설법으로 얘기할 수 있는 시대에 굳이 에둘러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풍자는 기껏해야 직장 상사, 그 일상의 권력만 겨냥할 뿐이다.
오랜 만에 들춰본 1980년대의 풍자만화에서 과거의 아픔과 현재의 편안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런 시대가 있었지. 권력의 촉수를 두려워하며 숨죽여 얘기 나눠야 했던 시절. 권력을 온전한 고유명사로 표현할 수 없었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1988년 출판된 주완수의 ‘보통 고릴라’는 권력을 고유명사로 말할 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은밀히 나누던 얘기들을 담고 있다. ‘보통사람들의 위대한 시대’라는 구호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제목조차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왜 고릴라로 표현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더욱더. 인간보다 열등한 두뇌지만 월등한 완력을 지니고 있는 고릴라를 등장시킴으로써 주완수는 당시 회자되던 권력의 속성에 대해 풍자한다. 그리고 마치 권력의 본질을 꼼꼼히 따져보려는 듯이 고릴라의 세밀한 묘사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어설프게 생략된 배경과 달리 한올 한올의 털까지 남김없이 그려내려는 듯한 고릴라의 묘사에서 독자들은 권력의 속성을 분석하려는 집요한 욕망을 느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지배하던 권력이 비인간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풍자만화,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 시사만화는 시대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풍자가 힘을 발휘하는 시대는 한 시대가 한 컷의 만화에 요약되는 시대이기도 하다. 이제 그런 단순한 시대는 사라졌다. ‘고릴라’는 모든 권력을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아니다. 여전히 힘은 세지만 권력의 머리는 훨씬 더 교활해졌다. 단일한 권력의 중심은 존재하지 않지만 병렬식 컴퓨터처럼 용량은 더욱 커졌으며 처리속도도 월등하게 빨라졌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편안함은 이 권력에 대한 해부를 포기한 데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단순했던 과거가 그리워지곤 한다.
(동덕여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