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까지 3만5000원. 10분만 기다리세요!”
추석연휴가 한창인 12일 밤 11시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대리운전회사 사무실. 10평 남짓한 사무실에는 이름표를 목에 건 깔끔한 정장차림의 여성들만 분주히 돌아다녔다. 지난 3월 국내 처음으로 설립된 이 여성전문 대리운전회사는 사장부터 직원에 이르기까지 14명 모두 여성이다.
집에서 싸온 송편과 전으로 허기를 달래던 직원 지모(38·여)씨는 “오붓한 가족과의 시간을 뿌리치고 나왔지만 태풍 때문에 손님이 생각보다 적고 빗길이 위험해 걱정”이라며 “하지만 친지들과 술 한잔 하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에 명절이라도 쉴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 여성대리운전자는 최근 어려워진 가정살림의 한몫을 맡기 위해 나선 전업주부부터 ‘투잡스(two jobs)’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연령대는 30대 중반에서 50대 사이다.
김화란(34)씨는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에게 3년째 월 100만원씩 학비를 보내고 있다. 월급의 8할에 해당하는 돈이다. 김씨는 “여자가 한밤중에 술 취한 사람을 데리고 다닌다며 눈을 흘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면 지칠 여유조차 없다”고 말했다.
넉 달 전 대리운전업에 뛰어든 유모(47·여)씨는 “손님을 댁까지 모셔다 준 뒤 텅 빈 도로에서 되돌아오기 위해 택시를 잡고 있을 때는 ‘내가 이 한밤중에 뭐하고 있지?’라는 생각에 눈물이 날 때도 더러 있다”며 “그럴 때마다 어려운 집안살림을 떠올리면서 마음을 다잡는다”고 말했다.
이들 대리운전자들의 하루 업무시간은 7~9시간. 일과는 오후 8시쯤 시작돼 새벽 5시쯤 끝난다. 하룻밤 사이 태우는 손님은 4~5명 가량이며 남녀를 가리진 않지만 주고객은 여성이다.
H여성대리운전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은 미혼의 이매단(37)씨. 한때 한 출판업체의 지사장까지 지냈던 이씨는IMF의 여파로 5000여만원의 빚을 졌다. 그 뒤 재기를 꿈꾸던 그녀는 “우후죽순 생겨나는 대리운전업계를 보면서 ‘깔끔한 매너와 안전운전’이라는 여성운전자들의 강점이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직접 회사를 차렸다. 직함은 ‘사장’이지만 그녀 역시 운전대를 잡고 일선에서 뛰고 있는 여성운전자다.
“한 달에 600여건의 주문전화가 오는데, 특히 여성고객들이 우리를 많이 찾습니다. 요즘에는 여성들도 사회생활을 많이 해 술자리가 많지 않습니까? 서울 강남지역에만 대리운전업체가 2500개가 넘지만 우리는 그 틈새를 파고들었어요. 하지만 취객을 상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우리 회사에서는 ‘남자 손님들이 성적으로 접근을 시도해올 경우 차에서 당장 내리라’는 원칙을 정해두고 있습니다.”
이 사장은 이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깔끔한 정장차림’을 고수하고 있다. 그는 “집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차림보다는 ‘전문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정장을 입으면 고객들의 태도가 확실히 달라져, 함부로 대하기보다는 예의를 차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밤새 운전을 하다 보면 아침에는 녹초가 돼 쓰러지게 마련인 이들이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은 복지관에서 제공하는 점심 도시락을 결손가정 아이들이나 독거노인들에게 배달하고 있다.
이들은 “심야시간에는 5000원의 할증요금을 받고 있는데, ‘이것만큼은 봉사하는 데 쓰자’고 의견을 모았다”며 “남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우리끼리 손님들과의 약속을 지켜나간다는 데 기쁨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