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수거물관리시설 후보지가 위도로 확정된 지 한 달이 지나면서 ‘핵폐기장백지화 범부안군민대책위’는 투쟁의 수위를 높였다. 군민 수천명이 지난 13일 오후 두 시간 가까이 고속도로를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거리 집회에서 ‘산자여 따르라’ 등 80년대 운동가가 높은 여성의 목청으로 울려퍼진다. 연단 위 종교계 인사는 군민들과 함께 ‘기꺼이 목숨도 내놓을 각오’를 다짐한다. 초·중·고생까지 가담한 시위에서 ‘핵은 죽음’이라고 새겨진 노란 T셔츠가 물결을 이루고 ‘때려××’는 구호도 반복되고 있다.
국민들은 198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오르는 낡은 기록영화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영상은 89년 영덕, 90년과 92년 안면도, 91년 영일, 94년 양산·울진, 그리고 95년 굴업도의 무대를 되풀이한다. 부안에서도 ‘핵폐기장을 서울로’라는 구호가 쏟아지고 자녀 등교가 거부되며 이장단이 집단사표를 낸다.
부안보다 훨씬 전에 영일과 양산, 울진 등에서도 주민은 격하게 공권력과 충돌했다. 국도가 점거됐고, 불타는 폐타이어 검은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안면도에선 파출소가 전소됐고 군청직원 5명이 손발을 묶인 채 속옷 차림으로 도로 위에 세워졌다.
이 시설 반대 주민들에게 ‘핵폐기장’은 여전히 ‘매향노(賣鄕奴)’들이 불러온 평지풍파일 뿐이다. 어른은 농수산물 판로와 관광객 감소를 걱정하고 초등학교 여자 아이는 “커서 낳은 아이가 기형아일 수도 있다”고 또렷이 말한다.
이 나라 산업문명은 원전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원전수거물시설이 재해나 인명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정부 홍보는 이 거리에서 맥을 못춘다. 이 시설 연간 방사선량이 자연 방사선의 10분의 1 이하이며, 전신 CT촬영 때의 1000분의 1에도 못 미친다는 정부 주장은 ‘태양열 지열 풍력 등 대체에너지를 개발하라’는 구호에 맞서지 못한다.
강도 7.2의 고베 지진에도 인근 11개 원전이 멀쩡했으며, 중저준위 폐기물은 300년 후 방사능이 사라지고, 사용 후 핵연료는 설계 내구기준 50년의 저장소에 중간 보관한다는 설득도 ‘사람의 일엔 실수가 있다’는 한 마디에 설 자리를 잃는다.
머리띠를 두른 여당 중진 의원과 환경단체 인사도 연단에 섰다. 정부를 불신하는 주민들은 과학기술의 복잡한 설명보다 ‘핵폭탄의 가공할 위력’을 가슴에 쉽게, 그리고 지울 수 없는 강도로 새겼다. ‘이땅 어디에도 핵폐기장은 안된다’는 주장에는 고개를 갸웃하는 주민도 ‘하필 우리 지역에…’라고 말한다.
정부는 17년간 공모도 해보았고, 비밀리에 추진하다 더 거센 저항에 부닥치기도 했다. 그래서 지역 지원금을 3000억원으로 늘리면서, 각종 지역개발을 약속했다. 그러나 주민과 정부 사이 공방이 한 치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 사이 이 사업 찬성주민이 90%를 넘었다는 위도에서마저 반대 움직임이 조직화되고 있다.
정부는 ‘최장기 미제(未濟) 국책사업’을 놓고 ‘현금보상’과 ‘주민투표’를 놓고 헷갈리는 등 차분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내년 7월 위도 부지 확정 전까지 특별법 제정, 개발계획용역 등으로 구체적인 보상안을 마련하겠다며 우선지원사업 20가지를 내놓았으나 주민 가슴에 와닿지 않는다. 후보지 선정이 번번이 반대 시위로 좌초된 사실을 잘 아는 ‘대책위’는 사업을 백지화하는 날까지 투쟁하겠다고 다짐한다.
17년짜리 해묵은 난제를 풀려면 청와대가 총리실이나 산업자원부가 알아서 하라고 미룰 일이 아니라, 누구보다도 대통령이 앞에 나서야 하고, 모든 정부 부처가 총력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예를 들어 우선 청와대 식탁부터 부안의 농·수산물을 올리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권위가 추락할 대로 추락했다지만, 국정 최고 책임자가 총력전을 펼치는 ‘올인’ 전략이야말로 손에 잡히지 않는 지역개발 약속이나 복잡한 과학기술자의 설명보다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김창곤·사회부 차장대우·cg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