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최대 증권사인 메릴린치에서는 지난주 갑자기 경영진 개편 인사가 있었다. 스탠리 오닐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이 정상에 오르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던 오닐의 최측근 토머스 패트릭 부회장이 돌연 사임하고, 1주일 뒤 패트릭 부회장의 오른팔인 아샤드 자카리아 부회장도 올해 말 물러나기로 했다.
10년 이상 파트너 관계를 유지해온 강력한 동반자였던 패트릭 부회장을 내친 이유는 간단하다. 패트릭 부회장이 절대 권력을 공유하기를 희망하면서 오닐 회장에게 자신의 심복 자카리아를 후계자로 지목해 달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년 전 오닐 회장 입장에서는 자신을 후계자로 지목했던 데이비드 코만스키 전임 회장까지 중간에 몰아내면서 잡은 권력을 순순히 포기할 리가 만무했다.
월가(뉴욕 금융가)에서 이런 권력 투쟁은 새삼스러운 뉴스도 아니다.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어 왔고, 패자는 말 없이 회사를 떠났다. 지난달 은퇴를 선언한 세계 최대 금융기관인 시티그룹의 샌디 와일 회장 겸 CEO도 처절한 전투의 승자였다. 보험회사인 트래블러스 회장이었던 와일은 금융 겸업화 추세에 발맞춰 시티은행과 전격적으로 합병을 하면서 존 리드 회장과 공동 회장직을 맡았었다. 하지만 이사회를 장악한 와일 회장의 수완에 밀려 리드 회장은 퇴장의 쓴맛을 봐야 했다.
크레디트스위스퍼스트보스턴(CSFB)의 존 맥 회장은 모건스탠리증권사 내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다가 재기한 케이스다. 모건스탠리증권사 회장이었던 존 맥 회장은 딘 위터와 합병을 하면서 딘 위터의 필립 퍼셀 회장과 번갈아 회사를 경영하기로 철석같이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퍼셀 회장이 이사회를 장악하자 승부가 끝났다고 판단한 맥 회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회사 문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6개월 뒤 CSFB 회장으로 스카우트됐다.
하지만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던 최고경영자도 자신이 물러날 때가 다가왔다고 판단이 되면 후계자를 키우기 시작한다.
메릴린치의 오닐 회장도 2년 전 차기 CEO로 정식 내정돼 험난한 최고경영자 수업을 받았다. 죽을 때까지 물러날 것 같지 않던 시티그룹의 와일 회장도 지난달 갑자기 올해 말에 CEO 자리를 찰스 프린스 투자은행 그룹 사장에게 넘겨주고, 2006년 정기 주총에서 회장직까지 물려주겠다고 폭탄 선언을 했다.
후계자를 미리 지목해 경쟁력 있는 전문경영인을 육성하는 것은 월가뿐만 아니라 미국 재계의 전통이다. 지난 2001년 12월 뉴미디어의 선두주자 AOL과 전통의 미디어 강자 타임·워너의 합병 성사 주역인 제널드 레빈 ‘AOL타임워너’ 최고경영자 겸 사장도 5개월 뒤 전격 사퇴를 선언하면서 후임에 당시 COO(영업담당 최고책임자)였던 리처드 파슨스를 내정했다.
‘경영의 귀재’ 제너럴 일렉트릭(GE)의 잭 웰치 회장도 은퇴시기를 공표한 지 1년 만에 현재의 제프리 이멜트 회장을 차기 후계자로 지목했다. 당시 GE 대변인은 “웰치는 지난 4년간 후계자를 물색해 왔다”고 밝혔었다.
권력을 잡은 자는 자리를 내놓지 않으려고 하고, 주변에서 틈만 나면 권좌를 노리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얼마 전 한국의 최대 은행인 국민은행에서도 정부 내 일부 세력과 국민은행 일부 임원진이 합심해 김정태 행장을 흔들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설이 돌았다. 폐렴으로 장기 입원을 했다가 퇴원한 김 행장이 곧바로 반(反)김정태 세력을 몰아내는 인사를 단행,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했다는 후문이다. 다만 한국에서는 아직 후계자를 지목해서 육성, 미래에 대비하고 있다는 최고경영자 이야기는 듣기가 쉽지 않다.
(김재호·뉴욕특파원 jaeh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