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콜로라도주에 한 고등학교 교정에서 난데없는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아래층 식당에서 시작된 총성소리는 아비규환 그 자체였고, 이로 말미암아 얼마후에 40여명의 많은 사람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잠시후에 캐시 버널이 공부를 하고 있는 도서관 2층 그곳에, 두 명의 반친구 학생이 그를 향하여 총구를 들이댔습니다.

그녀는 마침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허무주의에 빠져 방황하던 생활을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정리하고 새 출발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었을 때였습니다. 종교를 거부한 이 반친구 두사람은 총구를 그에게 대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 하나님 믿니? 잠시 침묵이 흘렀습니다. 드디어 캐시 버널 입에서는 “예스” 이 대답이 흘러나왔습니다. 거의 때를 같이해서 불을 뿜는 총구에서 정말 끔직한 피가 터졌습니다. 열 여덟의 꽃다운 나이의 케시 버널은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예스, 이 대답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아무나 할수있는 대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스라는 말속에는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위험도 있고 고통도 따라오는 말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예스라고 하는 이 분명한 말속에는, 그 사람이 철학을 가지지 않고는, 그 사람의 확신의 마음이 없이는 그런 말을 할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우리의 운명이 예스라는 말 때문에 뒤범벅이 될 수 있다는것 때문인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예스라는 말을 할수가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누구나를 막론하고 예스라는 말을 반드시 할 줄 알아야 합니다.아멘이라는 말을 우리가 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신앙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 말입니다.

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사람들은 예수로 인하여, 그로 인해서 흘러나오는 말이 예스라는 말을 해야할까요. 예스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않았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예스, 이 말 속에는 부정의 의미가 아닌 긍정을 받아들이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생산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으며 우리 미래에 대한 확신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스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한결같이 말하고 싶어하는 말이며, 또 말해야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보통사람들은 예스라는 말을 잘 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예스는 무거운 책무가 들어있는,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태의 추이를 바라보며 내게 있어서 사태의 추이가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는 사람은 예스라는 말을 함부로 할수가 없습니다. 예스는 매우 짧고 간결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정신이 들어있는 사람, 예수와 함께하는 사람,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 예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Yes’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정신을 가진 사람, 예수의 사랑을 받는 사람, 예수의 사랑을 받으며 감격하는 사람은 불리해도, 괴로워도, 고통스러워도, 내게 있어서 어려움을 주어도 물어오는 질문에 Yes라고 대답할수 있는 것입니다.

예스라는 그말로 인해서 내게 어려운 책무가 다가올지라도, 이것을 내가 반드시 견디겠다는 신앙적인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예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스라는 말 한마디가 죽을 사람을 살린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스라는 말 한마디때문에 살 사람이 죽은 경우도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이 예스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예스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예스가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예스때문에 사람의 운명이 불행이 또는 행복되는 사실을 가나안 여인의 예를 들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스라는 말 한마디로 말미함아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귀신들렸던 사랑하는 딸이 예수님의 고침을 받고 건강해졌습니다. 이로 인해서 항상 억눌렸던 자신의 불안과 고통은 그리고 참담한 그의 생활은 완전히 해소됐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입에서 나온 예스는 그의 생활의 보금 자체였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문 말씀을 접근하려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말씀 27절 말씀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여자가 그에게 “주여, 옳소이다만은 개들도 제 주인의 삶에서 떨어지는 부스럭지를 먹나이다.” 가나안 여인의 대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큰것입니다.

풍랑이는 갈리아 바다를 제자들과 함께 건너오신 예수님.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을 때에 두로와 시돈지방에서 막 나오는 가나안 한 여인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이 여기소서. 내딸이 흉하게 귀신에 들렸나이다. 주님은 이 말씀을 듣고도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제자들은 말했습니다. 여자가 뒤에서 소리소리 지릅니다.

적당히해서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자 예수님은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어버린 양 이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느니라. 냉정한 말이었습니다. 이 말이 들려지기가 무섭게 이 여인은 도와달라고 다시 한번 요청을 합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로 향하여 냉정하게 말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니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렇게 냉정히 거절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이 여자의 대답이 바로 그런 겁니다. 주여 옳소이다. 개들도 제 주인에게 떨어지는 부스럭지를 먹나이다. 바로 이 말 때문에 이 여인의 운명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러하면 이 말씀이 이 여자의 운명을 바꿔놓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들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럭지를 먹나이다”라고 한 이 말속에는, 바로 이 고백속에는, 이 가난한 여인의 신앙 전부가 농축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럭지를 먹나이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오늘의 이런 시간이, 우리들도 이런 신앙의 고백이 있어야 될줄로 믿습니다. 주여 옳소이다, 이말은 "Yes, Lord. 옳습니다 주님, 옳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언급하신 모든 말씀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라는 답변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이외에는 보내짐을 받지 아니하였다. 자녀의 떡을 어떻게 개들에게 던저 줄수 있냐는 주님의 말씀에 그렇습니다.

옳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맞습니다. 전적으로 그 말씀을 아멘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개같은 여자입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주님의 말씀이였지요. 그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온전히 동의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그 여자의 믿음을 엿보게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믿음은 Yes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성경의 말씀앞에서도 예스라고 말하게 되는것입니다.

Yes, Lord. 이 고백은 짧습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결단코 쉬운 고백이 아닙니다. Yes, Lord. 이 말이 이 여자의 운명을 바꿔놓듯이, “예 그렇습니다. 옳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틀린 것이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아멘.” -이것이 오늘을 사는 여러분의 운명을 바꿀수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딸이 흉하게 귀신이 들렸나이다. 그럼에도 애절하게도 그렇게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침묵을 지키셨으며 냉정한 태도를 일관하셨습니다. 끝내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어떻게 개들에게 줄 수 있겠는가 냉소적으로 말을 던지시는 그 주님이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내가 왜 개야 나는 사람이야, 나는 여자야, 나는 정말로 인생을 다 살아본 사람이야, 내가 어떻게 개야 이렇게 말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주님의 침묵어린 태도, 이 주님의 냉정한 태도에서 나오는 냉소적이며 자기를 향하여 찌르는 것같이 아픔을 주는 그 말씀에 대하여, 이 여자가 어떻게 모멸감과 수치심을 자극하는 주님의 말씀에 동의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매어달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옳다고 하면서, 아멘하면서, 주님이 해결해달라고 하면서 주님에게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이 여자에게 있어서, 이 여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밖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에게 예수는 최후의 해결을 줄 수 있는 카드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예수가 들어오고 계셨을 때에, 예수에게 달려나가 예수에게 매어달린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대안은 뭡니까? 여러분이 해결하기를 원한 모든 문제에 대한 여러분의 해결책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이 세상의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예수외에 대안이 없는 것을 믿어보면 알 것입니다.

가난한 여인은 혼자였습니다. 그 여자는 이방(異邦)의 여자였습니다. 흉악히 귀신들린 혹덩이처럼 따라다니는 그런 자식 때문에 고군분투하던 여자였습니다. 이 여자에게는 물질이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온전히 혼자였습니다. 바로 이때 찾아오신 주님께서, 점점 자기를 향하여 가까이 오며 두려워하시더니 이 여자에 있어서 최후의 희망이던 예수님을 외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최후의 희망이요, 자기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 해결의 대안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나간 것입니다. 그는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머뭇거림없이 찾아나가 소리를 질렀지요.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어 주시옵소서. 내 딸이 흉하게 귀신들렸습니다.” 우리는 이 고백에서 그 여자가 왜 예수그리스도의 그 냉정한 말씀에도 아랑곳없이, yes, yes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동기와 이유를 소개받게 됩니다. 주 다윗의 자손.

주 다윗의 자손이여. 오, Lord.그 주님, 주 다윗의 자손이 누굽니까, 그 주님의 말씀에 예스라고 긍정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류의 구주여 메시아라는 사실을 이 여자는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를 신앙하고 있다고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모시고 있다는 이 여자의 고백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그녀의 고백은, “나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 메시아임을 믿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려고, 내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우리 인류의 죄악을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메시아 하나님 이심을 믿습니다.” 이런 신앙의 고백이 되겠습니다.

이는 놀라운 고백이 아닌것입니다.이 마가복음 7장 26절에서 보면 이 가난한 여인을 두고 수로보니게 여자라고 하였습니다. ‘수로버니게’ 라는 그 민족은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인 시리아에 합병을 받은 페니키아인들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녀는 페니키아가 시리아에 복속되기 전에, 가나안 민족으로 있을 그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그리스도에 나왔기 때문에 마태는 그를 수로버니게 여자라고 하지 아니하고, 가나안 족속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온 이 여자는, 이스라엘의 백성들과는 철천지 원수인 암몬 나라의 시리아 나라인이 예속되어있는 사람으로서, 예수가 자기의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메시아 그리스도임을 믿는, 이 놀라운 믿음에 놀라운 비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언어와 종족과 성별과 국경선을 초월하여 당신의 살아있는 백성들에게, 당신이 구원하려는 백성들에게, 메시아 그리스도를 알려주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여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메시아 그리스도에게 믿는, 그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된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고백한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는 당신께서 당신의 혈통에 태어난 나의 구주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습니다.
이방 여인이 어떻게 유대인과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대단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폴레옹 대제는 말합니다. 용맹은 혈기에서 나오고, 용기는 믿음에서 나온다고. 오늘 여러분이 진정한 믿음이 있으면, 메시아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요, 내가 믿는 구주 예수는 하나님 아들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시며, 우리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으면 용기가 생기게 될것입니다.

그 용기가 예수께 나오게 하고 예수께 기도하게 하고 예수와 함께 할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말하며 주님께 나왔던 이 여인, 먼저 자신의 괴로운 문제를 고백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그는 가정의 문제인, 딸의 문제인 흉악히 귀신에 흘린 자신이 딸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자신에 문제를 해결해주며 그 자신에게 문제를 제공한 딸의 그 질병을 고침으로 자신의 아픔을 해결해달라고,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말합니다.

이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은 예수의 내면 깊숙한 세계에서 흘러나오는 주님의 사랑으로 나를 보살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의 간곡한 간구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는데 그게 어떻게 합당하냐고, 주님께서는 다른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씀을 했지만은 이 여자는 메시아로 믿어지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물러날리 없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만은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럭지를 먹나이다.

주여 옳습니다. Yes, Lord. 맞습니다. 나는 개같은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나는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예수를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앞에서 아픔을 느끼면서도 yes라고 말할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 이 여자의 문제는 해결되어 축복으로 변화되게 된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메시아로서 말만하고 안것만이 아니라 메시아 앞에 자신의 무릎을 꿇으면서, 메시아를 우러러보며 영적인 그런 예비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Yes, Lord. 옳습니다 주님. 여러분은 몇번이나 그런 고백을 우리 주님앞에 엎드려서 해보았습니까 Yes, Lord. 주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나는 죄인입니다. 주님이 두드려 주지 않으면 나는 죄에서 죽을수밖에 없는 옹졸한 죄인입니다. 맞습니다.

이런 신앙의 고백속에서 기쁨의 축복이 일어납니다. 은혜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는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예스라는 믿음 속에, 예수의 구주되심을 믿는 믿음을 주께서 그속에서 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긍정하는 믿음. 주님의 말씀앞에 나의 죄악을 고백하는 믿음, 나의 부정을 고백하는 믿음, 내가 주님 앞에서 엄청난 죄를 짓고 주님이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 받아주지 않으면, 주님이 이끌어 주지 않으면 도저히 설수 없다고, 이런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예수의 믿음. 이 지역은 바로 그 순간이 그 순간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미국의 부흥사였던 드와이트 무디(D.L.Moody)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 자신을 믿어보라 그대는 실망할 때가 있을것이다. 그대의 친구를 믿어보라, 어느날 그 친구가 죽거나 그 친구가 그대를 떠날것이다. 그대의 명성을 믿어보라. 그대의 명성을 훼방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대의 명성을 뒤집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보라. 그대는 현세와 내세에 후회하지 않을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를 믿다가 낭패하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주변의 사람을 의지하다 넘어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기를 긁어내리는 사람들로 인하여 파멸합니까. 우리가 예스라고 나와 고백하며 붙들 분은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거짓말 한적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각에 실망감을 준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가 없으신,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충성된 일꾼 의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더는 자기의 건강을 돌봐주는 그 의사를 매우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은 시기했습니다. 어떻게 저놈을 긁어내릴수 없을까, 그래서 참소의 편지를 알렉산더에게 보냈습니다. 얼마후에 잔치를 열고, 알렉산더는 많은 신하들을 초청하였습니다. 한참 흥겨울 때 알렉산더는, “들으라.” 그리고는 신하들이 보낸 그 의사를 훼방하고 모함하는 편지를 다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날 보라고 하면서 의사가 준 그 컵의 물을 마십니다. 그 편지에는 뭐라고 써있었는지 아십니까. “임금님, 의사가 임금님을 죽이려고, 그 잔에 그 컵에 독약을 발라놨습니다. 마시면 안됩니다.” 그런데 그 컵에 물을 먹었습니다. 여러분, 이 정도의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믿어주는것, 거기에는 생명을 바쳐 돌아보는 것이 따라오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를 믿을 때에도 이런 믿음의 자세로 믿어야합니다. Yes, Lord. 옳습니다,주님. 이 믿음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마가복음 7장의 말씀은, 마태복음 15장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은 내용을 다른 각도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7장 26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전적으로 네가 인정하고 내말에 대하여 너가 동의하였으니, 더이상 들을 것이 없다 더이상 다른것을 내가 들을필요가 없어, 다 됐어.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게됩니다. Yes. 이 한마디를 듣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이 yes라고 말한 말 한마디 때문에, 이 여자는 자신의 오랜 생활동안 극복할수 없었던 여러가지 문제들이 단번에 해결되어지게 되었습니다. 예스라는 말 한마디에, 가나안 여인에게 일어난 놀라운 축복의 모습을 보십시오. 실제로는 신분의 상승이 있었습니다. “여자야...” 개같은 여김을 받던 이방여인에게 그 당시 귀족의 부인에게나 붙이는 존칭을 붙였습니다. 그 yes라고 고백하는 그 여자의 신앙에 대하여 대단히 대단히 높은 존칭의 호칭을 불러주었습니다. 영적으로 주님앞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주님앞에 상승된 그런 신분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닌 둘째로, 그녀의 믿음이 주님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네 믿음이 크더라.

여러분, 세번째는 소원의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라...여기 네 소원대로 될지어라는 말의 원뜻은 '호델리스'라는 말인데 이 말은, 네가 원하는 만큼 될지어라.
여러분, 콩알만한 믿음을 가지고 예스라고 하면 콩알만한게 생겨요. 그러나 수박만한 믿음을 가지고 예스라고 하면 수박만한 결과가 생길거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주만한 믿음을 가지고 예스라고 하면 내가 감당하지 못할 축복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한 병생 선도사를 마친 스텐리 존스(Stanley Jones). 우리들이 신학교때 그분의 책에 심취한적 있죠. 스텐리 존스가 '디바인 예스(Divine Yes)'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가 69세때, 중풍에 걸려 쓰러져 미국으로 후송되고 미국의 보스톤 병원에 입원했을때에, 그는 5개월동안 누운 자리에서 '디바인예스'를 썼습니다.

그 디바인예스라는 책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말씀에 대하여 ‘예’라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아도, 우선 예라고 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그 말씀을 받는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엔 아니오가 아닌, 예라는 예스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 그것에 대해서 기록했습니다. 스텐리 존스는 병원에 누워서 참다운 나날을 보냈습니다. 정신은 멀쩡한데 사지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때 자기를 간병하는 간호사를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매님, 내가 내일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거든, 기다리고 계셨다가 내가 잠에서 깨어나게 이렇게 말해주십시오. 뭐라고 말할까요? 이렇게 말해줍시오. “나사렛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이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이튼날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뜨는 순간, 기다리고 있었던 그 간호사와 “나사렛의 이름으로 명하오니 일어나라.” 라고 말하니까 “예스.” 하고 일어났습니다. 일어났어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어요. 이것이 근거가 되는 ‘디바인예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69에 병들었다가 69에 일어났고, 그후 20여년동안 인도에서 선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게 된것입니다.

나사렛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라. 그러면 장로교인들은 가만히 있습니다. 이거, 되겠습니까? 한번 해봅시다. "나사렛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
그때 무엇을 생각하나니, 여러분의 처지를 생각하세요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을 버는 생각을 하세요 사업에 망한 사람은 다시 재기하는 생각을 하세요 병든 사람은 병마가 완전 물러나는 것을 생각을 하세요. 아들이 집나간지 두달인데 안들어오면 예스하는 순간 돌아오는 역사, 전화오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고 한번 해보세요
해볼까요? "나사렛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라."-"아멘".

여러분, 예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던지, 주님 말씀에 성경말씀에 어떠한 말씀이 있던지 간에, 우리는 이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을 읽을 때,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내 영혼에 울려퍼지는 하나님 말씀에 예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의 기적이나 이사야의 축복이 우연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사야를 보십시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해서 갈거라고 했더니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한마디로 말하면 “Yes, 내가 가겠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요. 우리들이 밤을 맞도록 잡은 것이 없으나, 내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봅니다. 이럴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의 이 시대는 지식의 신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순종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예스라고 말하는 사람이 예수에게 필요합니다. 예스라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