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곤/사회부 차장대우 <a href=http://db.chosun.com/man/>[조선일보 인물 DB]<

‘위도카페리 2호’에 올라 서해훼리호 참사가 난 93년 이후 꼭 10년 만에 위도를 찾았다. 그때 위도는 ‘통곡의 섬’이었다. 참사로 어이없이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63명을 잃은 주민들의 몸부림이 떠오른다. 거친 바다와 싸우면서도 순한 속마음에 그저 애절하기만 했던 그때 그 사람들….

위도의 파장금항(港)은 피서철을 맞아 울긋불긋 옷차림에 일부 ‘민박’, ‘낚시배 대여’ 등 간판이 늘었지만 누추한 모습은 그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섬을 순환하는 좁은 도로가 아스팔트로 포장된 것말고는 대부분 옛 모습 그대로다. 나무 그늘에 주민 7~8명이 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다. 주민들은 “당신들이 위도 사람들의 한(恨)과 속마음을 아느냐’며 언론에 대한 불만을 그대로 드러냈다.

“부안 읍내에서 시위대와 전경이 피 흘리고 있고 아직 법개정 과정과 정부와의 협상을 남겨두고 있는 마당에, 당신들이 위도 주민들을 보상에 눈먼 ‘매향노’(賣鄕奴)로 만들어 버렸어요.” 한 주민은 “일부 매스컴은 장관이 실질 보상을 위해 법규개정 등에 노력하겠다는 현지 발언조차 ‘현금보상 검토’라고 보도한 뒤, 정부가 ‘현금보상 불가’를 밝히자 흥정하듯 주민 반응을 물어오며 ‘위도 주민 반발’로 몰아갔다”고 성토했다.

곁에 있던 면사무소 직원도 “일부 사진기자들은 ‘이제 현금보상도 싫다’는 할머니들의 울분을 외면한 채 방폐장 유치위 현판을 떼내는 장면을 반복 연출시켰고, 그 사진은 ‘현금보상 불가 방침에 주민들이 반대로 돌아섰다’는 보도와 함께 쓰였다”고 덧붙였다.

위도 주민들은 잔뜩 자존심이 상해 있다. 수산물을 위판하고, 외상거래를 하던 이웃 격포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렵게 만들고 흉허물 없이 형님·동생으로 지내던 섬주민끼리의 갈등도 부추긴 데는 일부 사려 깊지 못한 매스컴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당초 주민들 대다수는 불타고 있는 핵연료보다 그 쓰레기가 훨씬 안전하며, 안전기준을 철저히 지키겠다는 정부의 말을 얼마간 믿었다고 한다. 그런데 위도 방폐장 부지 신청 이후 일부 매스컴은 이 시설의 백지화를 요구하는 시위와 경찰과의 충돌, 그리고 현금보상 논란 등에만 집중해 왔다는 것이다.

정부도 그렇다. 방폐장의 안전성과 시급성, 방폐장 유치 절차의 합목적성을 쭉 주장해왔던 정부가 지금 와서 주민투표의 실시 여부를 놓고 고민 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유로운 토론 공간에서는 주민 설득이 가능하다고 예상하며 설사 반대가 있어도 방폐장 건설은 예정대로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도대체 진의(眞意)를 알 수 없는 모순된 발언들의 나열이다.

한 주민은 “이제 주민 상당수는 환경단체 주장을 듣고 불안해 하고 있다”며 “언론은 찬반 논란의 근본 쟁점을 보도해야 하지 않느냐”고 항의했다.

위도 방폐장이 타당한지에 대한 진지한 검증은 이뤄지지 않은 채 정부와 반대 군민 사이는 벌써부터 격한 대결 양상이다. 격한 대결은 정부의 실책 반복 때문일 수도, 이 사회에 만연한 그릇된 갈등해소 구조에서 비롯됐을 수도 있다.

10년 전 기자는 서해훼리호 참사가 수습되고 한달 뒤, 취재를 위해 한 차례 더 위도를 찾았다. 언론들에 의해 사고 초기 배를 버리고 피신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받다가 끝내 선체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던 고 백운두 선장의 유족을 찾았다. 남편에 대한 잘못된 보도들로 여러 날 깊은 고통에 시달렸을 부인의 흐느낌에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위도의 방폐장 유치 보도도 자칫 또 한번 그런 오류에 빠질지 모른다.

“방폐장이 들어오든 그렇지 않든 주민 대다수는 부안 군민으로서 위도를 떠나지 않고 살 것입니다. 위도를 두 번 죽이지 마세요”라는 한 주민의 말대로, 이들을 오직 돈만 밝히는 식으로 몰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김창곤·사회부차장대우 cg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