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의 재조정에 관한 윤곽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한강 이북에 전진배치된 모든 미군 병력을 북한의 장사포 사정거리 밖의 먼 후방으로 옮기고, 그간 미군이 수행해온 중요한 특수 임무를 한국군이 맡으며, 미국은 신무기를 한국에 새로 배치시킴으로써 방어력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가능한 한 2006년까지 대부분의 주요 계획을 완료하겠다는 방침 아래 서두르고 있다.
미국 국방부의 전문가들은 앞으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북한은 미사일 또는 장거리포에 의존하며 특수부대를 후방으로 침투시킬 가능성이 높아 이제 인계철선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한다. 9·11사태 이후 세계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테러전 등 새로운 형태의 안보 위협에 대비, 전진 배치된 미군 병력을 고정시켜 놓는 것보다는 기동성 있는 병력으로 대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 현재 41개나 되는 주요 미군기지가 한국 내 흩어져 있어 작전·군수, 미군의 생활환경 조성 등에 많은 문제점이 있다고 레온 러포트 주한미군사령관이 지난 4월 미국상원 청문회에서 지적하는 등 재조정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하필 북핵문제로 국내외가 떠들썩한 이 시점에 미군의 ‘인계철선’을 없애고, 주한미군을 재배치하며, 미군의 중요 특수 임무를 한국군에 넘기는 등 동맹관계의 제반 사항을 서둘러 재조정하는 것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반미 감정과 대북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한·미 양국관계가 미묘한 상황 속에서 재조정이 진행된다는 것 자체부터가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미국은 왜 중대 사안을 이렇게 조급히 매듭지으려는 것일까. ‘자주 국방’과 ‘미국과 대등한 관계 정립’을 추구하는 노무현 정부와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서울의 분위기가 가라앉기 전(前)에 절호의 찬스를 놓칠세라 민감한 주한미군 재배치문제를 매듭지으려고 서두르는 것일까.
미국 국무부의 한 고위 관리는 “지난번 반미시위 이후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절대로 과거와 같을 수가 없으며, 이러한 미국의 인식이 앞으로 한·미관계 재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작년 한국의 대선에서 후보자들이 반미 감정을 공개적으로 표출한 데 대해 많은 우려를 표시하며, 미래의 한·미동맹에 관한 재검토를 주도적으로 추진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급작스러운 안보 상황의 변화는 국내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 외국 투자자들도 한국의 안보 상황이 불안하다는 판단이 서면 언제든지 떠나 한국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도 있다.
나아가 한·미관계에 예상치 않은 부작용을 야기할 수도 있다. 1971년 닉슨 대통령 당시 미군 제7보병사단의 급작스러운 철수로 인해 한국인은 미국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시도하면서 나아가 ‘코리아게이트’사건을 불러일으켰다. 1976년 카터 대통령의 일방적인 미군 철수 시도로 인해 한·미 양국관계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물론 오늘의 주한미군 재조정은 과거와는 상황이 다르다. 그러나 한국인의 눈에는 미국이 일방적이고 또 서두른다는 짙은 인상을 주는 게 사실이다.
한·미 양국은 서로가 꼭 필요한 상대다. 따라서 양국의 동맹관계는 길거리에서 표출된 일시적인 반미 감정으로 상처를 입어서는 안된다. 미국은 한국의 어려운 입장을 고려해야 할 것이고, 한국도 미국이 대테러 전쟁 속에서 대외정책을 수행해가고 있음을 이해,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정책을 펴나가야 할 것이다.
양국은 혈맹이고, 한국은 미국의 도움으로 자유민주주의체제로 전환을 성공리에 마무리지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일한 사례다. 미국은 동맹을 잃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김승환·명지대 교수·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수석연구위원)